방송전, 100원짜리 지폐를들고 구멍가게로 달려간다. 얼음 한덩어리를 사오면 아빠는 커다란 수박을 쩍쩍 소리나게 자른다. 엄마는 숟가락으로 정갈하게 수박을 떠낸다. 찬장에서 꽃무늬 모양의 음각이 새겨진 화채 그릇을 꺼내서 준비한다. 가족 모두 TV 앞에 앉아 수박화채를 먹기 시작한다. 전설의 고향을 알리는 구성진 성우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효자다. 늙은 어머니를 위해 깊은 산골에 얼음을 구하러 간다. 우연히 숲속을 헤메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천 년 묵은 구미호가 약초꾼의 간을 빼 먹는 것을 보게 된다. 그녀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남자의 사연을 듣고 그를 신뢰하고 놓아준다. 평생 아무에게도 구미호를 봤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전제로. 그리고 남자는 돌아오는 길에 갈 곳이 없는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하고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온다. 둘은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물론 영악한 나는 이글을 읽는 당신께서도 짐작하셨듯이 그녀가 그녀(구미호)인지 바로 알아 차린다. 아름다운 외모와 착한 마음씨의 여인은 그의 아내가 되어 열심히 일하고 자식까지 낳게된다.
10년이 되는 어느밤, 남자는 은밀한 얘기를 꺼낸다. 아름답고 헌신적인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자랑스럽게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마치 명품 선물 포장지 위 리본 풀듯이 술술 떠벌린다. 갑자기 현숙한 아내의 모습이 싸늘한 눈빛의 요괴로 변한다. 설마 당신이 신뢰를 저버릴 줄 몰랐다며 피 끓는 원망을 한다. 여인의 차가운 목소리는 사랑하고 믿었던 남편의 배신으로 칼에 맞은 적장처럼 비장하게 변한다. 높은 설산에 사는 여신의 모습처럼 서늘하고 아름다운 구미호는 하얀 소복 자락을 날리며 사라진다. 박차고 나간 창호문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덜컹 거린다. 안개 속으로 아내는, 아니 구미호는 그렇게 떠났다. 그녀의 한 맺힌 아름다운 눈동자가 떠오른다. 구미호는 365일을 하루 하루 마음 졸이며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시간과 그의 시간은 틀림없이 달랐을 것이다.
방송에 전설의 고향 구미호가 나오는 순간이면 모든 것을 멈추고 " 구미호다" 하고 소리친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1980~ 90년대 여름 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요즘 아이들에게 구미호 얘기를 하면 "구미호가 뭐가 무서워요"라고 웃고 지나가지만 어린 나는 화장실 가기 조차 무서워 동생과 함께 꼭 손잡고 갔던 기억이 난다.
단 하루만 넘기면 되는 그 밤에, 어리석은 남자는 모든 것을 잃고만다. 남은 삶을 그는 후회하고 살았거나 비참하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평생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약속을 깸으로써 자신의 인생도 날아가 버린 비참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목숨 걸고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삶에 많은 질문을 던지는 설화이다
어린 시절 내내, 구미호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화장실을 갈 때도, 엄마가 김치독에 동치미를 퍼오라고 할 때도, 혼자 산길을 걸을 때도, 동생을 찾으러 낯선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도 구미호는 나를 따라 다녔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숨겨야 하는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많은 구미호들이 이웃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삶은 그렇게 어렵고도 처연한 것이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또는 자랑스럽게 말할 때가 너무 많다. 남의 말을 함부로 하고 있는 건 아닌지, 타인과의 약속을 너무나 쉽게 깨는 건 아닌지 한 번쯤 돌아봐야 할 때이다.
가끔씩 이런 말 안 해야 하는데 하면서 말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약속은 생명과 같이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약속을 내뱉고 지키지 않는 이 시대에 꼭 새겨야 할 말을 구미호가 대신하고 있다.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들은 여자가 봐도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들이다. 쪽진 머리가 까만 공단처럼 그렇게 고울 수가 없다. 상냥하고 다소곳하고 좋은 아내이며 효심깊은 며느리이다. 떠나는 그 순간에도, 길게 풀어헤친 은빛 머리가 광채를 내뿜는다. 샤워를 1시간 이상 하고 나왔을 때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의 아우라처럼 그 연기 속에 가장 중요하고도 심오한 철학을 알리며 뒤돌아보지 않고 떠난 구미호의 옷자락이 생각난다. 그녀의 슬픔이 가슴에 와 닿는다. 요괴지만 더 인간다운 요괴. 고운 마음씨와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는 요괴. 슬픈 운명의 요괴, 그런 요괴들이 몹시 그리워진다.
단 하루만 넘기면 인간이 돼서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그 마지막 밤에, 어리석은 남자는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죽을 때까지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약속을 깸으로써 자신의 인생도 날아가 버린 비참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목숨 걸고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자는 과연 몇이나 될까? 삶에 많은 질문을 던지는 설화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전세계 전인류의 보편적인 도덕관이 있다면 그건 "약속"일 것이다. 약속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상대방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을 수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나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인생이 잘 풀리면 다 내 복이려니 하고 방심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이 있다. 여우같이 간계하고, 돼지처럼 탐욕스럽고, 곰처럼 어리석으며, 악어처럼 비열한이란 표현은 짐승이 아니라 인간에게나 어울리는 비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신중해야 되며 도덕적으로 항상 경계하고 살아야 한다. 더군다나 상대가 나의 생명을 살려 주고 삶의 행복을 가져다준 분이라면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행동했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가졌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지금,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살고 있는데도 새삼 그녀가 그립다. 무더운 여름밤이면 그녀의 슬픈 모습이 떠오른다. 난 평생 구미호 같은 여자이고 싶다. 남편이 약속을 지키는 10년 동안 아름답고 헌신적인 아내였던 것처럼.
정온/ 수필가
정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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