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K리그 대전시티즌 소속으로 활약했던 에니키는 정규리그 홈경기에서 골을 넣은 후 팀 동료 지아고와 함께 유니폼을 들어 올리는 세리모니를 펼쳤다. 유니폼 안에는 '내 몸에는 자주색 피가 흐른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흰색 티셔츠 안에 검정과 자주색으로 명확하게 새겨진 글귀는 경기 전 속옷에 적어 두었다가 득점 시 팬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두 선수의 아이디어였다.
당시 세리모니는 대전뿐 아니라 K리그 모든 팬의 부러움을 샀다. 홈 팬들을 위한 작은 이벤트에 불과했지만, 대전 올드팬들에게 이 장면은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대전팬들에게 자주색은 대전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다. 시민구단 시절 클럽송의 앞부분도 '영원토록 휘날려라 자줏빛 투혼'으로 시작됐고 구단 상품을 비롯해 마케팅 자료 대부분이 자주색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2020년 대전시티즌이 하나금융그룹이라는 새 주인을 맞이하면서 클럽을 상징하는 색깔도 하나금융의 '하나 그린'이 중심을 차지했다. 20년 넘게 팀의 상징이었던 자주색은 '하나 그린'과 함께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대전하나시티즌은 대전시티즌의 전통을 계승한 구단임을 강조하며 시민구단 시절 상징인 엠블럼과 자주색을 재창단되는 이미지에 반영시켰다.
그런데 최근 대전이 새 시즌을 맞아 출시했던 유니폼에 팬들이 반발하며 집단행동에 나서는 등 한바탕 해프닝이 있었다. 대전이 새로 출시한 유니폼에서 자주색이 제외됐기 때문이다. 기업구단 전환 이후 팀의 간판 색깔이 사라지고 있는 것에 불만을 가졌던 팬들이 참았던 감정을 터트렸다.
이달 9일 있었던 홈경기에서 대전 팬들은 대전은 '대전은 자주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고 온라인을 통해 강하게 항의했다. 팬들의 반발에 대전구단은 사과 성명을 내고 간담회를 열어 유니폼 출시 과정에 대해 해명하는 간담회를 했다.
암울했던 역사를 뒤로하고 새로운 변화로 아시아 최고의 명문구단을 만들고자 하는 구단주의 포부를 반대하는 대전팬은 단 한 명도 없다. 대부분 팬도 하나금융그룹이 추구하는 아시아 대표 구단으로의 포부에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과거 K리그 주요 구단의 유니폼을 디자인했던 한 디자이너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보다 전통을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다"고 말했다. 새로운 변화보다 중요한 것이 전통을 유지하고 계승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로 풀이된다.
'명문구단의 조건' 그것은 화려한 성적이나 스타플레이어가 전부가 아니다. 긴 역사를 통해 팀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스토리를 공유함으로써 팀 고유의 팬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명문구단을 향한 제1의 조건임을 대전하나시티즌이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금상진 기자 jod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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