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災殃)이라는 단어.
재앙이란 천변지이(天變地異) 따위로 생긴 불행한 변고를 뜻하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는 어휘인 것이다.
'일본은 원전 폭발로 인해 큰 재앙을 당했다' 라는 경우에 흔히 사용되고 있다. 일상 언어로 사용 된 경우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오랫동안 전화도 없고 문자 메시지도 없이 애를 태울 때 '당신의 무관심은 저에게 크나큰 재앙입니다.' 이런 문자를 보냈다 해보자.
'재앙'이라는 단어야 말로 상대편 마음을 크게 흔들어 답장을 안 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잡은 사람이 지금의 내 아내, 우선순위 1번인 것이다.
'말똥말똥'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아버지나 손 위 어른들을 말똥말똥 쳐다본다'에 사용될 때는 감동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 -윤석중 먼 길-
이 동시에 사용된 '말똥말똥'은 맑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귀엽게 바라보는 천진난만한 아가의 모습이 연상되는 단어이다. 이처럼 우리말은 상황에 따라 알맞게 사용하면 상대편 마음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말이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 한국인들은 눈이나 귀가 입보다 말을 많이 한다고 한다.
이른바 통찰(洞察) 의사소통인 것이다. 통찰 의사소통은 말로 의사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마음에 있는 내용을 훤히 꿰뚫어 봄으로써 그 뜻이나 의도, 감정을 파악하는 것인데, 우리 한국인들이 통찰 의사소통이 발달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첫 번째 이유가 농경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농경은 규칙적인 작업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람끼리 서로 말이 없어도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통찰이 부드럽게 이뤄지면 아름다운 말이 되는 것이고 부드러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물론 말로 하는 의사소통은 명료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고 솔직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관계가 딱딱해지고 밋밋하여 정감이 없다는 느낌이 들 때도 많다. 말없이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말로 하는 것보다 훨씬 지혜롭고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 중 영국이나 미국의 식민지하에 있던 나라들은 모국어보다는 영어를 주로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일본 지배를 36년간이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민족성이 강한데다가 주시경 선생이나 최현배, 김성배 같은 국어학자들이 모진 탄압 속에서도 우리말을 지켰으며 '한글학회'나 '한말글 사랑 한밭 모임' 같은 단체가 우리 글을 갈고닦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한 가지가 있다. 영어를 잘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국민소득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체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김용복 / 극작가, 칼럼니스트
김용복 |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