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버리지 못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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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버리지 못한 이야기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 승인 2020-11-17 09:13
  • 신가람 기자신가람 기자
임숙빈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대전에 온지 20여년만에 이사를 하게 됐다. 집값이 오르지는 않아도 사는 데 불편이 없어 나 같은 사람이 살기에 딱 맞는다며 느긋했는데, 하필 집을 사도 팔아도 세금으로 두들겨 맞는 이 시국에 옮겨야 할 판이니 입맛이 떫다. 이사를 앞둔 채 집안을 둘러보니 비교적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산다고 생각했고, 집을 보러온 지인도 '미니멀 라이프' 라고 칭찬까지 했건만, 여기저기 짜 넣은 붙박이장 속에는 버릴 것투성이다.

언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환경을 살리려면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은 집밖에 내놓지 말고 다시 써야 한다는 어느 쓰레기 박사님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원래의 용도는 아니어도 간간이 적당한 쓰임새로 재탄생하는 물건들이 있어 묘한 기쁨을 느끼게 하는데, 이런 간헐적 강화가 쉽게 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리라.

여하간 정년도 목전에 다가왔으니 이 기회에 한바탕 정리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환자들이 당사자 연구를 하듯이 스스로 살펴보았더니 필자가 버리는데 가장 망설이는 것은 책 종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공과 관련된 문헌들이야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한 마구 버릴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그 외에도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류, 시집이나 수필, 화집, 각종 사전류, 저자들로부터 받거나 선물로 받은 책 등등이 빛바랜 채 꽂혀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일기장이나 오래 묵은 잡기 노트들도 꽤 여러 권이 있었다. 책장에 반듯하게 꽂혀 있으니까 이제껏 청소하는 눈에 뜨이지 않았던가 보다. 그런데 묵은 노트들을 살피다가 결국 다시 꽂았다. 무엇에 쓸지 언제 쓸지 모르겠지만 일단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차 정리만 해도 책장은 훨씬 깔끔해졌다.

책장 정리는 학교까지 포함해 대대적으로 하기에 이르렀는데 일하는 곳과 사는 곳에 있는 책들은 확연히 달랐다. 학교의 책장 정리는 이제까지 묵힌 게으름을 반성하면서 손목 인대에 무리가 가지 않을 만큼 완급 조절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관심은 있었으나 미처 연구하지 못한 채 두었던 문헌 자료들, 교내외 위원이나 임원으로 책임과 관련했던 시효 지난 자료들, 혹시 참고로 할까 싶어 두었던 자료들을 정리했다. 물론 제자들이나 젊은 교수들에게 쓸모가 있다고 생각되는 자료는 따로 챙겨두며 버릴 것을 내어놓으니 이렇게 많은 것들이 있다고 생각지도 못했다며 미화부 아주머니가 깜짝 놀란다. 이 또한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던 탓일 게다.

그런데 정리하는 과정을 계속하는 동안 버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을 다시금 느꼈다. 작게는 재활용품수거일에 맞추어 내놓는 일도 쉽지 않지만 어째도 버리기에는 망설여지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정리해버리기에 아쉬운 것들이라면 아마 거기에는 그 사람의 역사가 함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온 집안을 쓰레기 천지로 방치하는 사람조차도 그만의 아픈 역사가 있음을 듣지 않는가. 그 수준이 병적이어서 고통이 따른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추억, 기능 추구, 알뜰함, 게으름 무엇이든 간에 나름의 개성이니 뭐라 말할 게 없다고 본다.

버리는 것이든 채우는 것이든 지나친 것은 모두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다시 늘어나는 요즈음 시간을 활용해 나름의 역사 정리를 제안한다. 우선 자신의 공간을 한번 살펴보자. 그리고 정리해보자. 그중에 자꾸 마음이 쓰여 버리지 못하는 게 있다면 그것으로 '나만의 역사'를 꾸며보는 것이다. 버리지 못하는 그것에는 내가, 나의 이야기가 들어있을 테니까. 글로, 혹은 사진으로, 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무엇인가로 표현하면서 겨울 초입에 들어선 나무들이 잎을 떨구어 몸을 가볍게 하듯이 버리고 비우기를 해보자.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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