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 저널리즘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이슈가 생길 때마다 반복되는 행태였다. 노무현, 신정아, 세월호, 안희정 그리고 연예인들.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숨찰 지경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논두렁 시계와 문화일보의 신정아씨 누드 사진, '전원 구조'라는 확인되지 않은 세월호 침몰 사고 보도와 희생자에 대한 신상 털기, 안희정의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연예인들에 대한 보도는 더 가관이다. 도대체 언론이 이들을 인격체로 생각이나 하는 지 의문이 들 정도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고 낙인 찍힌 이들에게 사생활이 없다는 건 이제 한국사회에서 당연시 되고 있다. 거기다 'TV 조선', '채널 A' 등 종편의 편파적이고 왜곡된 보도는 언론의 하향 평준화를 초래했다. '5.18은 북한군의 개입이 있었다'는 지만원 등 극우 논객의 발언을 여과없이 내보내, 법적·역사적 정당성을 훼손하는 유의 보도를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악성 댓글은 자유로운 영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지금 인터넷 실명제를 부활시키자는 여론이 높다. 과연 이 가공할 폭력을 끝낼 수 있을까. 그러나 인터넷 실명제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헌재의 위헌 결정이 있는 만큼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참담한 건 설리 사망 이후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클릭 유발 기사가 여전히 보도된다는 점이다. 이같은 악순환의 고리는 포털 중심의 뉴스 제공 시스템에서 기인한다. 온라인 클릭 수는 편집국의 매출로 연결되기 때문에 언론은 쉽사리 포기 못하는 것이다. 어뷰징 기사가 끊임없이 양산되는 이유다. 어뷰징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기사를 포털에 반복 전송해 클릭수를 올리고 광고 수익을 얻는 수단이다. 이런 더러운 방식이야말로 저널리즘의 황폐화를 보여준다. 허나 모든 언론이 네이버, 다음 양대 포털에 종속돼 있는 터라 울며 겨자먹기로 거기에 기생해 연명해야 한다.
이런 마당에 망가진 저널리즘을 논한다는 것이 부질없을 지도 모른다. 저널리즘의 목표가 정치 권력 혹은 자본이라면 저널리즘의 철학은 진즉에 시궁창에 내다 버렸을테니 말이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의 열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상을 집어삼킨 지 오래다. 언론이라고 이 무시시한 괴물을 당해낼 재간은 없는 모양이다. 애초에 언론은 진실, 공정성을 저널리즘의 가치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가치를 자본이나 권력과 맞바꾸는데 일말의 죄책감조차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됐다. 출입처와 보도자료에 의존하고 광고주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기이한 현실. 이런 메커니즘에 길들여진 언론은 감시자가 아닌 기득권의 대변자가 되어 생존의 길을 모색하는 중이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말했다.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고 가야 할 길을 알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한가." 논쟁만 있고 성찰은 없는 지금, 한국 언론은 밤하늘의 별이 될 것인가, 자본의 진창에서 허우적댈 것인가.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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