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욱 KISTI 국가슈퍼컴퓨팅본부장 |
지난 30여 년간 줄곧 세계에서 제일 빠른 슈퍼컴퓨터 보유국의 자리를 놓고 미·중·일 간에 엎치락뒤치락하며 치열하게 각축을 벌여왔기에 이들 3국이 최초의 엑사급 슈퍼컴퓨터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그리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다. 오히려 지금 관심을 갖고 한번 지켜봐야 할 점은 엑사급 슈퍼컴퓨터를 바라보는 유럽연합(EU)의 시각 변화다. 그 동안 EU는 슈퍼컴퓨터 도입·구축 및 소프트웨어관련 연구개발에는 예산을 투입하였지만 하드웨어 연구개발에는 예산을 거의 투입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 때문에 지금까지 유럽 내 슈퍼컴퓨터의 대부분은 글로벌 제조사들을 통해서 구축되고 있다.
이러한 EU의 슈퍼컴퓨터 정책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2018년 5월에 EU내 10개국 산·학·연으로부터 23개 기관으로 구성된 유럽 프로세서 이니셔티브(European Processor Initiative) 컨소시엄이 발족시키고 향후 유럽 자체 브랜드 엑사급 슈퍼컴퓨터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EPI 컨소시엄이 발족된 지 약 6개월 만인 2018년 12월 유럽 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1억2000천유로(약 1600억원) 예산을 투입하여 EPI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EPI 프로젝트가 시작한 지 약 6개월만인 지난 2019년 6월에 소위 유럽 프로세서 구조 설계안을 처음으로 공개하였다. EPI 프로젝트의 목표는 유럽 브랜드 저전력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개발된 EU 자체 프로세서 기술은 EU 엑사급 슈퍼컴퓨터 구축에 우선 활용하고, 긍극적으로는 인공지능과 데이터센터 시장, 미래 자율주행 자동차 반도체 시장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EU가 이처럼 프로세서 기술 독립을 선언하고 지난 1-2년 동안 EPI 관련된 일련의 사업들을 일사천리로 신속하게 진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로, 최근 고성능 프로세서 기술 생태계의 변화 조짐을 들 수 있다. 30여년 이상 서버 시장을 독점해온 인텔 x86 프로세서의 아성에 도전하는 개방형 저전력 프로세서 기술 생태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오픈 IP 라이선스 기반의 ARM, 오픈소스 기반의 RISC-V와 POWER 프로세서가 개방형 프로세서 기술 생태계의 새로운 주인공들이다. 이들 개방형 프로세서 기술을 기반으로 목적과 용도에 따라서 맞춤형 고성능 프로세서 칩 제작이 가능해지고 관련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점점 성숙해지고 있으며, 인공지능 및 자동차 반도체 시장이 미래의 확실한 먹거리 등장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최근 미·중과 한·일 무역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각국의 보호무역정책 강화를 들 수 있다. 미래 핵심 기술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걱정이 이제는 현실이 됐다. 2015년 2월 미 상무부의 인텔 제온 칩의 대 중국 수출금지 조치, 그리고 2019년 6월 중국 슈퍼컴관련 제조사 및 연구소에 대한 미국의 핵심 부품의 대 중국 수출 제한 조치가 지금의 EU 프로세서 기술 독립 의지와 왠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EU의 이러한 발 빠른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자체 프로세서 기반 엑사급 슈퍼컴퓨터 구축에 관한 국가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황순욱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국가슈퍼컴퓨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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