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
괜한 열패감이나 자기혐오가 발동될 때마다 쓸데없이 하던 망상 중의 하나는, 위로부터의 강력한 억압이 있어야만 좀 나아지려나 하는 기대였다. 너무나 방만한 내 자아, 부담스러운 만연체로 흐르고 넘치는 나의 의식과 상상은 - 거꾸로 자유를 빼앗긴 절제되고 엄격한 조건 속에서만이 보다 유효한 생산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위로부터의 강력한 억압의 구체적인 방안을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그 내용은 엄청 유치하다. '감옥 같은 곳에 들어가 폭행을 당하면서는 무서워서라도 매일 논문을 쓸 텐데' 하는 식인 거다. 많은 시나리오 작가가 호텔방을 일종의 감옥 겸 작업 숙소로 잡고 들어가, 제작자에 의해 가두어진 채 쪼이며 글을 써내기도 한다는 풍문이 있는 걸 보아선, 나 같은 성격의 사람이 글쓰기 분야에 적지 않은지도 모른다.
문제의 해결책은 엉뚱한 데에 있었다. 위로부터의 압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답이었다. 아기를 낳고 아기를 키우면서 내게 생겨난 가장 큰 변화는 내가 매일 집안 구석구석을 닦는다는 것이다. 바닥 닦기는 물론 - 아기가 하루 종일 침 흘리며 뒹구는 매트를 닦고, 아기가 입에 넣고 빨던 장난감을 닦는다. 이건 나의 바닥, 나의 구석구석을 닦는 수신제가가 된다. 이렇게 전에 없던 몸의 성실성이란 게 생겼다.
지금 나는 출산과 육아가 내게 무슨 특별하고 대단한 깨달음을 주더라며 그 경험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돌이켜 보면 나를 견제하는 것이 또 있었다. 바로 학생들이었다. 그저 내가 보살펴 주어야 하고, 내가 먹이고 씻겨야 하며, 내가 가르치고 길러야 할 존재들의 당연한 울음, 합리적 지적, 이유 있는 불만 앞에서는 영 고쳐지기 어려울 것 같았던 좋지 못한 습관까지 교정되더라는 얘기다. 하도 할 일을 미루어 마감에 쫓기며 글 쓰는 나조차 강의만큼은 충실하게 준비하는 편이더라는 얘기다.
위보다 아래가 무섭다. 외부권력의 강제보다 자기 책임 하의 자율이 힘도 세고 지속 가능하다.
내가 낳은 존재에게 왜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나. 반대로 나를 낳은 부모에게는 왜 내가 이걸 해야 하느냐고 따질 수 있다. 심지어는 왜 나를 낳았느냐며 반항할 수도 있다. 불효자가 되면 그만이고 저항자가 되면 그만이다.
하지만 책임의 영역은 그렇지가 않다. 본인이 낳아서 태어난 자식에게 너는 왜 태어났느냐고 따져 물어서야 되겠느나. 갓난아기가 우는데 아무리 몸이 무거운 자라도 벌떡 일어나지 않고 어떻게 배길까. 이런 연유로 나는 내내 기다려온 자기혁명적 시간을 맞이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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