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생존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취업이 안되는 학과는 통폐합하는 식으로 자구책을 써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다. 취업률이 낮은 기초학문은 통합하거나 폐지하고 실용학과를 강화하는 방향이다. 대학이 취업양성소가 되고 있다. 인문학은 쓸데없는 학문이 돼버린 것이다. 오죽하면 지난해 1월 어느 방송에서 암호화폐를 두고 벌인 토론에서 유시민 작가가 "제가 문과라서 죄송한데"라고 농을 던졌겠는가. IMF 위기를 겪은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가 불어닥치면서 자본이 헤게모니를 쥐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내가 아는 후배는 성공의 열망에 사로잡힌 사회 초년생이었다. 의욕이 넘쳐 뭐든 열심히 하는 후배가 대견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새파랗게 어린 사람이 출세지향적이어서 민망스러웠다. 그는 책도 자기 계발서만 읽었다. '성공하려면 이렇게 하라'는 투의 처세서 말이다. 순수문학 관련 책을 읽는 것은 한번도 못봤다. 실용주의 학문의 득세를 예고하는 순간을 맛본 씁쓸한 경험이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죽음은 삶이 만들어낸 가장 훌륭한 발명품"이란 철학자같은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과연 인문학 애호가 잡스다운 명언이다. 스티브 잡스는 신처럼 추앙받은 CEO였다. 잡스의 애플의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은 완벽한 예술 퍼포먼스였다. 그의 검은 터틀넥 스웨터와 리바이스 청바지, 뉴밸런스 운동화 차림도 고도의 전략이었다. 그가 만든 제품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예술품으로 불렸다. 그 어떤 유명인사도 잡스만큼 청중을 사로잡지 못했다. 그는 수익만을 추구하는 장사꾼 같지 않았다. 그는 영리했다. 그는 "애플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인문학과 결합된 과학기술 덕분"이라고 말했다. 청년시절부터 예술적이고 흥미로운 뭔가를 하고 싶었던 잡스는 일본의 선불교와 힌두교의 명상, 바흐에 심취했다. 그는 첨단 기술에 자신의 인문학적 소양을 덧입혀 상업적 성공과 지적 권능을 가진 최고의 기업가로 이름을 남겼다.
이제 기업가는 단순히 돈만 버는 경영인이 아니다. 도덕과 지성을 갖춘 영웅으로 변모했다. 빌 게이츠, 안철수(한때는) 등은 사회 가치를 실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투기꾼에 불과한 워런 버핏이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세상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인문학 열풍이 거세다. 백화점 문화센터는 인문학 강좌로 북새통을 이루고 대학은 '인문학 최고위 과정'을 개설해 기업가들을 모신다. 자본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인문학 열풍이라니, 아이러니다. 기업의 CEO도, 대중도 인문학에 열광하는데 정작 대학은 어떤가. 인문학은 외면당하고 취업을 염두에 둔 실용주의 학과만 양산한다. 인문학은 부조리와 고독과 절망과 죽음을 분석하고 성찰하는 학문이다. 세월호 침몰, 플라스틱 쓰레기, 강원도 산불 화재는 우리에게 질문을 요구한다. 당신은 산불로 불탄 집 앞에서 가족의 추억이 사라졌다며 울먹이는 남자에게 공감하는가. <미디어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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