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익 한남대 교수 |
이후로도 몇 번 방문했지만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옆 건물까지 전시관을 넓혔다는 정도랄까, 임시정부 수립 때부터 워낙 작았던 탓에 거창하게 손볼 수는 없었을 터이다. 혹시 있었을지도 모를, 도시재개발에도 옛 모습을 간직하게 해 준 상하이 당국의 배려가 오히려 고맙게 느껴지곤 했다.
이 청사는 임시정부가 처음부터 있었던 곳은 아니다.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김신부로(보창로라는 견해도 있다)에서 수립되었는데, 이후 여러 장소를 전전하다가 1926년에야 겨우 정착했던 곳이 바로 지금의 청사 유적지다.
이곳에서 6년여를 있던 임시정부는 1932년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일본의 압박이 거세어지자 상하이를 떠나 기나긴 방랑을 하게 된다. 1940년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8년간 중국 곳곳을 떠도는 험난하기 그지없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방랑은 숱한 환란에도 독립에의 의지를 꺾지 않았던 독립지사들의 결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도 하다.
물론 임시정부가 일사불란하게 활동했던 것은 아니다. 수립 초기부터 외교론과 투쟁론, 또는 창조론과 개조론으로 대변되는 노선 차이로 싸웠으며, 수립 때 왔다가 다시는 오지 않았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문제를 비롯해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의 이념적 문제로 대립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갈등은 어떻게 독립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적인 갈등이었던 것이지 임시정부 무용론이나 해체론 차원의 갈등은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임시정부의 업적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곧 우리나라의 이름은 해방 후에 마련된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가 이룬 업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헌법의 정식 명칭도 '대한민국 임시헌법'이었다. 우리 국호를 제안했던 신석우 선생도 기억되어야 하겠지만, 백성들이 주체가 되는 나라임을 뜻한 것도 선견지명으로 같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이명박 정권 시절 이른바 '건국절' 소동이 있었다. ‘뉴라이트’ 학자들이 주창하고 당시 정권이 호응했던 이 소동은 일종의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왜냐면 건국절이라는 이름 아래에는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독립운동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들 알다시피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는 친일파도 끼어들었던 것이다. 올해는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이며 동시에 대한민국 건국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 민족은 남북으로 갈려 있으며 민족의 온전한 나라로 되기에는 아직도 먼 여정이 남아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지사들의 결기를 오늘의 우리가 결코 잊지 않는다면 그 여정도 곧 현실화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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