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주저앉고서야,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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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주저앉고서야, 비로소…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 승인 2018-11-13 08:32
  • 방원기 기자방원기 기자
임숙빈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어느 새 십일월 중순이다. 한 해가 다하려면 아직 한달여 남았다지만 매년 되풀이되듯이 서둘러지는 마음을 피할 수가 없다. 올 2학기는 특히 황금연휴니, 징검다리 연휴니, 축제니 어수선한 9, 10월을 지나 이제야 대학이 제 시간에 제 수업을 하는 차분한 분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공휴일이라 수업을 못했다 해도 보강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아마 이번 학기는 12월 마지막 주까지 온전히 수업이 진행될 것 같다. 그래서 실습까지 해야하는 고학년 학생들 중에는 연휴가 오히려 괴롭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학기 초 출석 때문에 필자가 온통 신경을 썼던 OO이도 이제는 좀 안정을 찾은 것 같아 참으로 다행스럽다. 학생이 결석을 연거푸 두 번 하면 교수들은 긴장한다. 왜냐하면 3회 이상 결석을 하면 제 아무리 시험을 잘 봐도 점수를 줄 수 없기 때문인데, 대개의 교수들이 출결로 인한 F학점을 주기 싫은 마음에 한번만 결석을 해도 학생을 불러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고 수업평가 규칙도 다시 설명하곤 한다.

학생이 규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니 결과에 따른 책임도 학생이 지는 것이지, 어린 아이도 아닌데 교수가 일일이 신경 쓸 게 무엇이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 사는 게 그렇게 논리적이기만 한가. 더욱이 OO이는 지난 학년까지 매우 모범적으로 지냈기에 의아하기도 하고 한편 걱정스럽기도 했다. 알고보니 역시 집안에 어려운 사정이 생겼고 이로 인해 힘든 상황을 넘기고 있는 중이었다.

학생을 불러 당부를 하다보니 필자의 대학 초기 모습이 떠올랐다. 필자는 초, 중, 고등학교 12년 개근을 했는데, 대학에 입학한 후 2시간 이상 걸리는 등굣길로 인해 걸핏하면 지각을 했다. 처음에는 속을 끓이기도 했지만 통학에 지치기도 했고 그 동안의 생활 행태에 지루함을 느끼면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편하게(?) 지각을 하곤 했다. 물론 모범학생 라벨은 일찌감치 떨어졌고 학점도 엉망이었지만, 이런 일탈도 필요한 거라고 스스로에게 억지를 부리며 그 학기를 얼버무렸다. 그리고 다시 성실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혹시 OO이도 그렇게 지쳤던 것은 아닐까? 지나치게 학업에 매달렸던 스스로의 모습이 싫어지고 지치던 차에 집안 사정이 방아쇠가 되어 되는 대로의 행동이 튀어나온 것 아닐까? 차라리 그랬다면 좋겠다. 앞만 보고 빠르게 달릴 때와는 달리 주저앉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털썩 주저앉았지만 정신을 놓치지 않을 때, 그 경험을 통해 생각을 키우고 조망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이 자기를 지키는 힘인지 알 수 있게 하니까. 그래야 절실한 꿈도 소망도 생겨나는 것이니까.

가을 물든 나뭇잎들이 꽃보다도 더 화려할 수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 이 계절, 정용화 시인의 시, 『터널이라는 계절』을 다시 찾아 읽었다.

그 곳에 터널이 있었다.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에 / 바람이 저지른 일을 계절이 이해하는 과정에서 가끔씩 터널이 몸을 뒤척인다. 내 쓸쓸함과 너의 어둠이 조도를 맞추는 동안 눈빛은 이미 겨울쪽으로 기운다. - 중략 - 웅크리는 것으로 계절을 통과하고 나면 시리게 쏟아지는 빛으로 활짝 눈이 부신 봄이다. / 헤어짐의 방식으로 나는 비로소 당신에게 도착한다.

OO이가 이 시를 읽었으면 좋겠다. 아니, OO이와 함께 이 시를 나누고 싶다. 시인이 느끼는 터널이 무엇이든, 시인이 말하는 웅크림이 어떤 것이든, 시인이 노래하는 당신이 누구이든 상관없다. OO이가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마주친 터널이라는 계절을 조용한 웅크림으로 빠져나가면 시릴 만큼 눈 부신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바램을 가슴에 품었으면 좋겠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제껏 자신을 받치고 있는 에너지를 찾아서...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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