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에어컨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선잠이 들었던 게 얼마 전인데 엊그제부터는 에어컨 리모컨을 찾지 않는다. 침대 옆 창문을 아주 조금 열고 자면 새벽엔 추워서 이불을 끌어안게 된다. 가을이 왔다. 너무 더웠던 이번 여름, 가을이 오기는 하는 걸까 싶었는데 지난 가을의 추억이 생각나는 걸 보면 정말 가을이 왔다. 가을 하면 흔히 떠오르는 몇 가지 이미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독서다. 가을이 왔으니 본격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 유독 가을에 책 읽는 정서가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먼저 가까이 앉은 회사 후배들한테 물었다. 후배 석이는 "여름은 덥고, 겨울은 따뜻해서 졸리고, 봄은 놀러 나가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라고 했다. 요즘 같은 여름엔 웬만해선 어딜 가나 시원하다고, 겨울은 보일러나 난방을 조절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가을에는 놀러 나가고 싶지 않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또 다른 후배 진이는 "책 한 권 들고 산책 나가기 좋은 날씨여서"라고 했다. 책 한 권 들고 잔디밭에 뒹굴던 나를 떠올리면 공감할 수 있는 얘기다. 그러나 그 이유가 '독서=가을'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기엔 약한 감이 있다.
구글링을 해 봤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인 5가지 이유'란 글을 보니 가을은 당나라 문호 한유가 아들에게 책 읽기를 권했던 시기로, 날씨가 춥지가 덥지도 않아 적합하다는 거다. 두 번째 이유는 가을은 추수와 함께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는 것. 세 번째는 나름의 과학적 이유를 대고 있다. 신체 호르몬 중 '행복 호르몬'이라 불리는 세로토닌이 유독 가을엔 분비량이 적어지면서 흔히 '가을 탄다'고 하는 고독한 신체와 정신 상태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 차분한 정신이 독서에 적합한 신체적 조건이라고 한다. 네 번째 이유는 사실 가을에 책이 제일 안 팔려서 가을을 독서의 계절로 둔갑시켰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일환으로 이 시기 독서를 권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지막 이유는 아주 오래전 중국에선 대나무를 돌돌 말아 책처럼 썼다고 하는데 이 대나무가 많이 나는 시기가 바로 가을이라고 한다.
내가 찾아본 글에도 있는 문구지만 '책을 읽는 이유는 많다.' 가을이 책 읽기 좋은 계절이라고는 하지만 각 계절에 그 이유를 붙이라고 해도 다섯 개씩은 댈 수 있다. 대학 시절 한 수업에서 전공 교수님 가라사대 아무리 피곤하고 술을 먹어도 잠들기 전 책 한 쪽, 한 문장이라도 읽는 습관을 가지라고 했다. 물론 교수님 말씀에 계절은 없다. 그래서였을까. 강박인지 습관이지 모르게 나는 술 마신 어젯밤에도 김환기 화백에 대한 책을 읽다 잠들었다. 때때로 음주 독서는 읽은 부분을 다음 날 또 읽어야 하는 후유증(?)을 낳지만 습관 자체는 들여도 무방할 것 같다.
가을이다. 가을이니까 책을 읽고 봄, 여름, 겨울엔 그때도 나름의 이유로 책을 읽자. 대전에선 매년 사서들이 100권의 책을 모아놓고 그중 한 권을 골라 함께 읽자는 재밌는 독서 운동을 하고 있다. 올해의 책은 편혜영 작가의 '죽은 자로 하여금'이다.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본성과 욕망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의 이야기다. 올 가을 우리가 '죽은 자로 하여금' 무엇을 생각하게 될지, 책 읽는 계절 가을을 만끽하며 책을 펼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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