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을 만나고 서울에서 대전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이었다. 한 승객이 객실 반대편 끝에서 28번 좌석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KTX엔 28번 좌석이 없는데...'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신경을 끄고 스마트폰 리듬게임을 실행하는 중이었다. 내가 앉아있는 좌석은 1A번이었는데 28번 좌석을 찾는 승객이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2B좌석에 앉았다. 2B를 28로 잘못 읽어 생긴 일이었다. 만약 좌석 번호가 '2가' 라고 써있었다면, 혹은 정말 숫자로만 이뤄져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차 뿐 아니다. 대전의 일부 시내버스에는 '버스가 STOP 하기 전에는 BUS에서 일어나지 마세요' 라는 안내문이 붙어있기도 했었다. '차량이 정차하기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세요' 라고 적어도 충분히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외국인들을 배려해서 영어를 표기한 것이라면 온전하게 한글 문장을 적고 그 밑에 영어 문장을 적어놓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영어를 대체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기도 하고 외국어를 써야 의미전달이 잘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대부분의 외국어들은 얼마든지 우리말로 표기해도 뜻을 전달할 수 있다. 한글로 적는 것이 더 깔끔하고 명확할 때도 많다.
영어 남용 사례는 특히 화장품, 의류 등 홍보문구에서 더 자주 접할 수 있다. '비비드한 컬러감이 매력적인 스커트' 라는 문구, '크리미한 텍스쳐가 립 라인을 퍼펙트하게 만들어줍니다' 와 같은 홍보문을 볼때면 오히려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선명한 색이 매력적인 치마', '부드러운 질감이 입술 선을 더 돋보이게 해줍니다'라고 적으면 판매량이 줄기라도 하는 걸까. 홍보문구 뿐 아니라 티셔츠와 모자 등 의류에도 영단어나 외국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사에도 영어가 절반인 곡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베이비(Baby)', '아이 러브 유(I love you)'가 들어가지 않은 노래를 찾기 더 어려울 지경이다. 의미 없는 영단어 나열을 듣고 있노라면 우리나라 가요를 듣는 건지 팝송을 듣는 건지 고개가 갸우뚱해지기도 한다. 제목부터 가사까지 온통 외국어인 노래들이 넘쳐나다 보니 유선호의 '봄이 오면'처럼 가사가 우리말로 채워진 곡들이 반갑기만 하다.
신조어나 비속어, 은어의 사용을 줄여야 한다고 하지만 과도한 외국어 사용 역시 지양해야한다. '발음이 정확해 가사 전달력이 좋다'는 것을 '딕션이 좋아 가사 딜리버리가 잘 된다'고 표현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외국어를 무조건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세계에는 6000여 가지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이 중에서 10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250개에 불과하다. 자랑스럽고 소중한 우리말을 더 올바르게 사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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