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악마의 카드섹션은 조별예선부터 화제를 모았다. 폴란드와의 예선 1차전에선 "Win 3:0" 2차전 미국전에선 "Go KOR 16!" 3차전 포르투갈전은 "대한민국"이었다. 16강전이 대전으로 확정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카드섹션으로 집중됐다.
응원전을 담당한 붉은악마 중부지부는 고민에 빠졌다.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문구를 두고 수많은 아이디어가 거론됐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한참을 시름하던 중 운영진에서 번뜩이는 제안이 나왔다. 1966년 영국월드컵 당시 북한대표팀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1:0으로 승리했던 기억을 재현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축구역사에 있어 1966년 월드컵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굴욕의 역사다. 듣도 보도 못한 북한이라는 나라에 우승후보 이탈리아가 탈락을 한 것은 경악할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1966던 아이디어는 만장일치로 확정됐고 문구는 "AGAIN 1966"으로 정했다. 2002년월드컵 현장총괄을 맡은 붉은악마 중부지부 신재민 회장은 16강 경기 바로 전날 붉은악마 회원 1백 명을 동원해 카드 1만장을 좌석에 배치했다. 신 회장은 회원들에게 별도의 지시를 내렸다. 카드를 좌석에 바닥에 깔지 말고 등받이에 붙이라는 지시였다. 당일 오후 연습이 예정된 이탈리아 대표팀을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신 회장의 예상대로 훈련을 나온 이탈리아 대표팀은 남쪽 좌석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굴욕의 트라우마가 36년의 세월을 넘어 이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선수단 관계자는 즉각 반발하며 FIFA측에 항의했지만 붉은악마의 카드섹션은 이미 마무리 단계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흑역사 문구를 등지고 묘한 여운 속에서 훈련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경기 당일인 6월18일 "AGAIN 1966" 카드섹션은 전 세계 취재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하게 공개됐다. 외신기자들은 "AGAIN 1966"에 담긴 스토리를 한국 취재진의 입을 빌려 기사에 담았다. 붉은악마와 대전시민이 만들어낸 촌철살인의 합작품이 전세계로 타진되는 순간이었다.
경기 시작부터 기세에 눌린 이탈리아 대표팀은 자신들이 가진 저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체 역전골을 허용하며 무너졌다. 경기가 한국팀의 승리로 끝나자 외신들은 "대한민국의 붉은 함성이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일궈냈다"며 "1966년의 악몽이 대전에서 재현됐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한밭벌에서 일어난 '기적' 그것은 선수들만이 아닌 12번째 선수 붉은악마와 대전시민이 이뤄낸 감동의 역사였다.
금상진 기자 jod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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