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의 영역도 다채롭다. 극장에서 놓친 영화 장면을 꺼내봐도 색다르다. 그렇게 '번지 점프를 하다'를 보는데, 왜 숟가락은 'ㄷ'이고 젓가락은 'ㅅ'이냐고 묻는다. '술'의 ㄹ이 ㄷ으로 바뀌는 활용과 '저+가락'의 사이시옷이나 맞춤법 4장 4절 29항은 들어본 적도 없다. "젓가락은 이렇게 집어먹으니까 'ㅅ' 받침 하는 거고, 숟가락은 이렇게 퍼먹으니까 'ㄷ' 받침 하는 거지. 이게 약간 'ㄷ'같이 생겼잖아. 모양이." 합성법에 무지한 인우는 태희에게(이병헌은 이은주에게) 엉터리로 둘러댄다.
웃음 포인트는 그다음이다. "너 국문과 아니지. 응? 아니지?" "그거 4학년 돼야 배워." 그런데 말이다. 종편 시사물 드립이 이런 유(類)의 대사보다 더 극적으로 웃기기도 한다. TV를 정보 간 빈틈을 메워 참여도를 높이는 쿨 미디어로, 라디오나 영화를 단일한 감각에 집중시켜 참여도를 낮추는 핫미디어로 나눈 마셜 매클루언. TV에 우호적인 이 문명비평가를 존경하지만 이럴 때 이 부분만은 정말 정반대로 뒤집고 싶다. 아닌 게 아니라 경제신문 TV의 주식·부동산 분석의 경우, 제한된 상담까지 곁들여 쌍방향 참여처럼 보일 때는 있다. 그러나 TV의 기본 베이스는 '맥락 없음'이다.
실제로 아침에 괜스레 확인한 TV 편성표의 FIFA 월드컵 러시아 2018 특집, 살림하는 남자들, 슈츠 13회, 추적 60분은 상호 연관성이 없다. TV가 사라져야 할 과학기술이라는 제리 맨더의 과격함에 동의하지 않지만 TV가 수동적 매체라는 견해에는 동조한다. 엊그제 어느 단체장 후보가 어린이집 아이들과 TV 끄기 캠페인을 진행하는 걸 봤다. 2세 미만 권장 시청시간을 O으로 설정한 미국 사례가 생각났다. YMCA 등의 TV 끄기 운동의 선의는 100% 이해하면서 100% 찬성하지는 않는다.
대체 불가능한 TV의 어떤 효능 때문이다. 가끔씩 얻어걸리는 슈츠, 어바웃 타임, 미스 함무라비, 훈남정음, 같이 살래요, 부잣집 아들, 검법남녀 같은 드라마는 내겐 맛있는 디저트다. 순서와 회차가 뒤엉킨들 전혀 지장이 없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국민여가활동 1위가 TV 시청인 이유는 이쯤에서 풀린다. 국민 각자에게는 존중받아야 할 다양한 시청 목적들이 있다.
멋지게 좀 표현해서, TV 시청은 '생각'에 굽이 높지 않은 '구두'를 신겨 세상을 보는 행위다. "7㎝ 위에서 내려다보면 세상이 바뀐다"는 키높이 구두여도 상관은 없겠다. TV 시청 때의 뇌파가 수면 때와 비슷하다는 바로 이 기막힌 기능으로 TV를 무한 사랑한다. 심심할수록 똑똑해지는 세칭 바보상자 앞에서 편성표는 또 무용한 것이었다. 거룩한 공휴일에 곱빼기로 일한 오늘은 무념무상의 푸른 초장으로 인도할 TV 시청시간을 두둑이 늘려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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