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와 내부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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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와 내부고발

  • 승인 2018-02-01 13:10
  • 원영미 기자원영미 기자
장수익
장수익 한남대 문과대학 학장
1919년 단성사에서 공연된 ?의리적 구투(義理的 仇鬪)?는 우리 민족 최초의 활동사진으로 우리 영화 역사에서 기억될 작품이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제목이 일본식 어법이라는 점이다. 특히 이 작품의 줄거리가 가정을 위기에 빠뜨린 계모를 주인공과 그 의형제들이 나서서 처단하는 것을 볼 때, 제목에 쓰인 '의리'라는 말은 일본식 '의리'임을 잘 알 수 있다.

본디 '의리'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한다. 공자가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한 것이나 맹자가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의리는 실천적인 의미에서 사람이 올바르게 행해야 할 바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의리에서 중요한 관건은 과연 무엇이 올바른가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주자학은 이 올바름이 인간 본연의 마음이 지니는 속성인 인에 근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 올바름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만물의 이치에 따라 언제 어디서건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라는 말에 세상의 이치를 뜻하는 '리'를 붙인 '의리'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의는 대의와 소의로 나눌 수 있다. 대의란 말 그대로 세상 전체를 감안한 의이며, 소의란 각각의 상황에 초점을 맞춘 의이다. 물론 대의와 소의는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 얼핏 보면 소의에 치중해야 할 것 같은 가족이나 벗과의 관계 같은 구체적인 교유에서도 그 소의는 항상 대의를 기반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의리는 조선 시대의 성리학에서도 중요한 덕목이었다. 예를 들어 선비정신도 의리를 바탕으로 인간의 올바른 길을 밝히고자 한 것이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대의를 파악하는 중화주의의 문제도 있었지만 선비정신은 일본 또는 만주의 침입에 결연히 맞서는 도덕적 원리가 되었다.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던 개화기에 많은 선비들이 재산을 내놓고 자신의 몸까지 내놓으면서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했던 것도 선비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의리라는 말은 일본으로 가면서 소의 중심으로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중세사를 보면 왜 그랬는지 알 수 있는데, 가령 하급 귀족인 사무라이는 자신이 모시는 다이묘나 군주에게만 절대적 충성을 바쳐야 했다. 다이묘나 군주가 어떤 일을 꾸미든 무조건 그의 성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절대적인 도덕 곧 의리로 칭송되었던 것이다. 이는 임금에게도 대의에 어긋난다는 상소를 빈번히 했던 우리 선비정신과 크게 대비되는 사항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러한 일본의 좁은 의리가 귀족 계급 중심으로 메이지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도 그대로 남았고, 식민지 지배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도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또 식민지배를 벗어난 이후에도 친일파가 지배세력이 됨에 따라 선비정신을 기조로 독립운동을 했던 전통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의리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도 대의와 상관없이 조직이나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배신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만 쓰이게 되었다.

강권과 부패로 얼룩졌던 지난 정권들에서 내부고발자들이 오히려 '배신자', '변절자'로 낙인찍혔던 것도 이처럼 폭좁은 의리만 보는 가치관에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내부고발을 하는 것만큼 인간적 번민을 거쳐야 하는 것도 없고, 직장은 물론 신변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내부고발은 마땅히 보호되어야 한다. 폭 좁은 의리를 내세워 비난할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최근 한 방송에서 민간인 사찰을 내부고발로 폭로한 이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왜 내부고발을 했는가라는 물음에 '아이들이 아빠를 어떻게 볼지 염려되어서'라고 답했다. 이 말은 소의보다 대의를 택했기 때문이라는 말과 같다. 또 다른 뉴스를 덧붙인다면 검찰 조직에서의 한 검사가 성추행을 폭로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당한 성추행 사건을 해결하려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내부고발을 택했다. 성추행도 큰 사건이지만 그것을 덮으려 한 것은 더욱 큰 문제이다. 이들이 겪었을 번민과 고통에 연민을, 그의 결단과 행동에 동감을 보낸다.

장수익 한남대 문과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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