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익 한남대 문과대학 학장 |
191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이광수의 '무정'이 연재될 무렵, 많은 편지가 배달되었다. 편지들은 대부분 자살하려는 영채에 대한 것이었다. 성폭행을 당한 영채가 자살로 작품에서 사라지자 많은 독자들이 영채를 살려달라는 의견을 보냈던 것이다. 이후 이광수는 영채가 개화에 눈뜬 새 사람이 되어 돌아오게 함으로써 논란을 매듭지었다.
또 다른 장면이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이상의 '오감도'가 연재될 때에도 편지가 쏟아졌다. 독자들은 '웬 미친놈의 잠꼬대'를 귀한 지면에 매일 싣느냐는 항의 편지를 대량으로 보냈던 것이다. 결국 '오감도'는 "언제까지 십구 세기 식으로 살려고 하느냐"는 작가의 한탄을 남기고 연재가 중단되었다.
이 두 장면은 우리 문학사에서 독자의 자발적 반응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요즘 같으면 인터넷 기사의 댓글에 해당하는 반응이 편지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들은 비단 우리 문학사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언론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장면들인 것이다.
신문은 소통 성격 면에서 한 방향 매체의 유형에 속한다. 이때 한 방향 매체란 읽는 이가 쓰는 이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뿐, 그에 대한 반응을 드러낼 수 없는 매체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위 두 장면은 독자들이 한 방향 매체의 한계를 넘어 자발적 반응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요즘은 위 두 장면처럼 편지를 이용한 낭만적인 반응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두 방향 소통이 가능한 인터넷에서 신문의 기사를 보고 댓글을 다는 방식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핸드폰처럼 언제 어디서건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기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신문은 이제 두 방향 매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독자의 반응 영역과 정도는 그만큼 커졌다. 개별 뉴스를 보고 싶은 대로 골라보고 의견을 표현하는 각종 SNS가 나타났고 아예 게시판에서 독자들끼리 의견을 나누는 방식이 확산되었다. 하버마스의 말을 빌린다면, 이는 '다양한 공론장의 본격적 형성'으로 요약될 것이다.
통상적으로 공론장의 형성은 크게 두 측면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첫 번째 측면은 정치권력의 일방성에 대한 견제이다. 공론장이 민주주의 체제에 필수적인 것도 그 때문인데, 선거 외에는 의사를 직접 표현할 길이 없던 종래 상황과 달리, 이제 국민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보다 빠르고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일방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측면은 신문 같은 한 방향 매체의 권위에 대한 제한이다. 종래에는 어떤 기사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져도 독자들이 서로의 의사를 모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댓글의 형태로 공론장이 형성됨으로써 독자들은 서로의 의견을 집약하여 보도에 집단적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문제시된 지난 정권들의 댓글 조작을 보면, 그들은 정치권력을 일방적으로 행사하려고 댓글을 조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 지난 정권들은 두 방향 매체가 가져올 정치권력 견제를 댓글 조작으로 회피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작이 결국 실패했음은 지난 겨울의 촛불이 댓글의 공론장에서 비롯했던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한편 독자들이 요즘 언론들에 대해 왜 비판하는지도 공론장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언론 권력'이라는 비판은 아직 언론이 두 방향 매체로 변화한 것에 적응하지 못한 채 여론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독자들은 자발적으로 여론을 형성하는 공론장을 이미 가지고 있기에 언론의 여론 형성 유도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론장은 근본적으로 자발적이다. 그런 점에서 두 방향 매체의 시대에서 정치권력과 언론은 공론장의 자발성이 민주주의의 기초임을 인정하는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언론은 공론장에서 내릴 여론을 미리 의도해서는 안 되며 충실한 사실 보도와 민주적 기준에 따른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 공론장의 국민들은 기꺼이 언론 편에 서게 될 것이다.
장수익 한남대 문과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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