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수익 한남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
이러한 의문을 보여주는 사례로 ‘순수문학’이라는 용어가 있다. 1980년대까지 많이 쓰였던 이 용어는 문학은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독재정권이 지배하던 당시의 중등 국어 시간에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글을 다들 배웠던 탓인지는 모르지만, 문학은 순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종의 상식처럼 통용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 문학은 불순하고 더럽다거나 심지어 문학도 아니라는 판단이 일반화되었으며, 그러한 작품들은 그 작품성을 따지기도 전에 이미 불순하고 나쁘다는 낙인이 찍히곤 했다.
그러나 문학은 사람과 세상의 모든 면을 다루므로 정치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부르짖은 작품들이 정치적이었던 것처럼 정치는 문학이 다루는 주요한 영역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순수문학이 역설적으로 정치적 기능을 한 것도 문학과 정치가 분리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인간의 운명이나 자연에서의 삶을 그렸던 순수문학 작품들이 끼친 영향은 당대 사회의 문제들을 애써 외면하는 차원에 멈추지 않았다. 이 작품들은 정치적 견해를 드러낸 작품들을 폄훼하는 구실이 되기도 했으며 결과적으로는 독재정권을 정치적으로 옹호하는 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더욱 끔찍한 것은 당시 독재정권이 민주화를 지향하는 문학을 순수문학을 내세워 탄압했던 사실이다. 당시 독재정권은 민주화를 지향하는 문학은 정치적이어서 불순하니 탄압해야 한다고 정당화하면서 그런 문학을 금지하고 처벌했던 것이다. 이로 볼 때, 비-순수를 구별하여 배제하는 권력은 정작 순수문학에는 없었고 당시 독재정권에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최근의 문학예술에 대한 블랙리스트 사건은 지난 정권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었는지를 잘 알려준다. 어떤 면에서 지난 정권은 순수라는 말이라도 내세워서 문학예술을 탄압했던 과거 독재정권보다 훨씬 저급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지원금이라는 돈을 가지고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와 상반되는 문학예술을 억누르려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구나 그 돈이 그들의 돈도 아닌 국민이 낸 세금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들이 독재의 특징인 권력의 사유화는 물론 세금의 사유화마저 서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순수라는 말로 되돌아간다면, 최근 세계 곳곳에서 문제가 되는 극우나 극좌, 또는 종교 근본주의 역시 순수와 연관이 있다. 이 세력들은 자신들의 관념이나 가치관에 어긋나는 것을 불순한 것으로 본다. 여기서 이들이 불순하다고 판단된 이들을 교화하여 순수한 자신들의 편으로 바꾸려 하는 것은 그래도 평화로운 방식이다. 종종 이들은 불순한 것으로 판단된 사람들이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 힘도 없도록 억눌러버리거나 심지어는 아예 없애버리려는 폭력적 방식을 택한다.
순수에 대한 추구가 이처럼 폭력으로 귀결되는 것은 순수가 지니는 최악의 역설이다. 이 역설은 순수가 공존과 반대되기 때문에 생긴다. 다름과의 공존은 인류가 평화를 위해 지녀야 할 기본적 태도이지만, 순수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순수를 내세워 다른 인종과 민족, 종교나 정치에 대해 침묵과 귀순을 요구하며 최종에는 말살하려는 행위들이 순수를 자처하는 이들의 권력과 이익을 지키려는 불순한 목적을 띠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순수한 물이 사람에게 도리어 해로울 수 있듯이 순수만 있는 세상은 정작 순수의 편에 선 이들에게도 이롭지 않다. 보다 이상적인 세상은 똑같이 순수한 사람들만이 아닌 여러 다른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는 세상일 것이다. 섞여 있음이 주는 평화, 그것은 순수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불안할지 몰라도 우리 모두가 함께 미래로 나아가는 최선의 길이다.
장수익 한남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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