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수익 한남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
격식 있는 말씨름인 토론에서 이기려면 준비가 더 필요하다. 먼저 논란이 되는 것을 명확히 해서 토론이 엉뚱한 방향으로 번지지 않게 해야 한다. 또 주요 용어의 의미도 한정해서 말이 엇갈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상대방의 논지를 확인하여 뒤에 말을 바꿀 수 없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말씨름에서 이기기 위해 무엇보다 기본이 되는 것은 보편타당한 입장에 서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에 기반을 둔 채 윤리적으로도 긍정적인 입장을 가져야 말씨름에서 이길 수 있다. 그런 입장이 아닌데도 말씨름에서 이기려 한다면 무리한 꼼수를 쓸 수밖에 없다. 말뜻 바꾸기, 거짓으로 우기기, 부분을 과장하기, 맥락 무시하기, 상대의 의도를 지레짐작하기, 상대를 억눌러 말문 막아버리기 등이 말씨름 꼼수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꼼수를 부리게 되면 말씨름은 말싸움으로 바뀌고 만다. 말싸움은 말씨름과 달리 이기는 것만 목적으로 삼기에 좋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가 없다.
말씨름은 아직 대화의 차원에 있다. 대화란 관계를 돈독히 하거나 나은 미래를 가져오기 위한 행위이다. 그러하기에 말씨름은 설득의 형태를 띠게 되고,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입장을 수정하여 합의 또는 승복의 상태로 결론이 난다. 말씨름에서는 결국 쌍방이 모두 승자가 될 수 있으며 보다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반면에 말싸움은 상대방을 이겨서 억누르기 위한 것이기에 대화가 될 수 없다. 말싸움에서 서로 자신의 말만 외치는 독백의 시간이 지나면 나중에는 이긴 쪽만 말하고 진 쪽은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러나 말싸움을 이겼다고 해서 원래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으며, 대신 진 쪽의 상처만 깊어진다. 그런 까닭에 말싸움에는 잠시의 승자가 있을 뿐, 궁극적인 승자가 없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말싸움을 거는 상황에서 심판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좋은 심판이라면 말싸움의 꼼수를 못 쓰게 할 것이다. 이때 꼼수를 제지받은 쪽은 심판이 편파적이라고 항의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심판이 헷갈리면 안 된다. 편파적이라는 항의가 무서워서 꼼수를 모른 체 넘긴다면 말씨름은 말싸움이 되고, 심판도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꼼수를 제지하는 것은 심판이 갖추어야 할 덕목인 엄정한 중립성에 필수 요건이 된다.
말씨름이 자주 일어나는 분야로 대표적인 것은 정치다. 특히 민주적인 정치일수록 말씨름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좋은 정치가 되려면 말씨름도 제대로 수행되어야 한다. 이기는 것이 아닌, 미래를 위한 합의와 승복이 말씨름의 목적임을 잊지 않을 때 좋은 정치가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듯이 정치는 말씨름이 아닌 말싸움을 벗어나지 못하기 일쑤다. 상대를 이기기만 한다면 국민은 자신들을 선택할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에서 꼼수로 말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에서 심판 역할을 하는 것은 누구일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언론이며 궁극적으로는 국민들이다. 특히 언론은 말싸움에서 누가 꼼수를 부리는지 판단하는 역할을 한다. 바람직한 언론이라면 정치의 말싸움에서 분명하게 꼼수를 비판하고 국민들에게 이를 알림으로써 말싸움을 제지하는 기능을 할 것이다. 그것이 언론이 엄정한 중립성을 확보하는 기초가 된다.
언론이든 국민이든 지지하는 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지는 말싸움의 꼼수를 막는 엄정한 중립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편이라고 해서 꼼수를 방치하거나 아예 두둔하고 나선다면 그 피해는 정치뿐만 아니라 언론과 국민 모두에게 닥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하기에 언론과 국민은 누가 꼼수를 부리는지 판단할 수 있게끔 깨어 있어야 한다. 좋은 정치는 좋은 심판이 있을 때 비로소 구현되는 것이다.
장수익 한남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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