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정 대전작가회의 회장 |
며칠 전 지인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분의 말을 들으며 몸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지인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초등학교 때 “너는 공부보다는 몸을 쓰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라고 했다”한다. 기술 하나 제대로 익혀 몸으로 사는 것이 가장 흔들림 없이 사는 길이라고 본인의 경험을 통해 느낀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버지의 유언(공부 열심히 해라)을 다시 생각했다. 아버지와 지인의 말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짧은 순간 머릿속에 복잡해졌다. 지인도 한평생 몸을 쓰면서 먹고살았다. 40년 넘게 몸을 쓰다가 이제 직장을 그만두고 남은 시간 시를 쓰겠다고 한다. 아버지도 죽는 그 순간까지 농사일했다.
지인과 술잔을 들면서도 아버지의 말과 지인의 말에 대해 명확한 답이 그려지지 않았다. 두 분의 이야기를 놓고 누가 더 현실적인지부터 누가 더 자식에 대한 애틋한지에 대해 생각해 볼 때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둘 다 현실에서 체험을 통해 깨닫고 자식에게 이야기한 경험담이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 받은 대우와 땀의 대가가 얼마나 각박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식만큼은 그런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식이 공부 머리인지 아닌지 생각도 하지 않고 절대 몸을 쓰면서 사는 것은 볼 수 없다는 의지가 아버지의 말에는 담겨 있었다. 지인은 공부로 얻은 지식으로는 작은 격랑에도 흔들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 기술 하나 배워 큰 풍파 없이 한세상 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아버지와 지인의 고민은 하나의 길에서 만난다. 두 분 다 자식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자식이 세상 살아내면서 평지풍파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이런 문제는 나 역시 내 아이에게 하고 있다. 아이가 몸을 쓰면서 하는 일을 하든, 머리를 쓰면서 하는 일을 하며 살든, 작금의 현실에서 고민의 꼬리가 길 수밖에 없다. 그 고민의 끝점을 당겨서 보면 올바른 대우라는 목표점이 보인다. 땀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블루칼라라는 이유로 천대받은 사회가 지속되는 현실 앞에서 볼 때 공부 머리가 있든 없든 무조건 대학을 보내려고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그렇게 졸업한 대학 졸업장으로 비정규직도 잡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현실을 볼 때 어떤 부모가 고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동은 정직하다. 일을 하는 사람이든 시키는 사람이든 이 말은 새겨야 할 격언이 되어야 한다. 이런 풍토가 노동 현장에 자리를 잡을 때 내 자식이 몸으로 하는 일이든 머리로 하는 일이든 그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부모의 입장에서 고민의 끈을 지금보다 조금 더 느슨하게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아름다운 몸으로 일을 하는데 정당한 대우까지는 아니더라도 천대를 받는다면 누가 몸으로 하는 일을 하겠다고 나서겠는가. 몸은 정신을 담고 죽는 날까지 함께 살고 있는데 말이다. 몸이 생존하기 위해 존재할 때 그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노동이 생존이 아닌 생활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늦었지만, 부모님의 몸을 빌려 태어난 내 몸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김희정 대전작가회의 회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