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정 대전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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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런 맛을 잃고 말았다. 글만 써서 먹고 살기 힘들어 서울로 서울로 올라갔고 그만큼 발걸음이 줄어들면서 헌책방도 하나 둘 문을 닫았다. 누구를 탓할 이유도 없이 일어난 10년 상황이다. 그렇게 나도 큰일도 없이 멀어졌다가 무언가 그리워 무작정 걸어서 갔더니 30년 이상 헌책방 골목을 지켰던 사장님들이 문을 닫고 다른 업종 간판이 걸려있었다.
한 동안 갈 곳을 잃다 찾은 곳이 대흥동에 있는 ‘대전부르스’다. 막걸리가 특별해서는 아니다. 그곳에 가면 가난한 마음으로 앉아있는 예술가들을 볼 수 있어서다. 그 중 주인장 누님도 예외가 아니다. 바쁠 때는 함께 자리를 하지 못하지만 사람이 드문드문 하면 가끔 막걸리 잔 쳐줄 대상이 되어주었다. 구수한 충청도 말투도 좋지만 그보다는 예술가에 대한 주인장의 마음이 좋다.
‘대전부르스’ 가게 벽을 보면 대전의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걸려있다. 시(육필)도 있고 서예 글씨도 있고 그림도 있고 심지어는 벽에 양철을 붙여 벽화를 그려놓기도 했다. 한 마디로 술집 갤러리라고 불러도 무방한 공간이다. 몇달 전 가게에 아는 형의 육필시 작품을 술 마시러 온 손님한테 팔아 술값으로 쓴 적도 있다. 문학청년 시절에는 돈이 없어 책을 팔아 술을 마셨는데 나이 먹어는 육필시를 팔아 술을 먹는다며 술자리에서 입담할 추억 한자락 넓힐 수 있었다.
이렇게 대전부르스에서는 예술가들이 전시가 끝나고 맡겨둔 작품을 걸어놓고 판다. 그것을 좀던 형편이 나은 다른 예술가가 사 가기도 하고 술을 먹다 작품이 마음에 닿은 누군가가 사가기도 한다. 가끔 돈없이 마음만 있는 나같은 사람은 주인장 누님에게 깎아달라며 떼를 쓴다. 그러면 누님은 거기에 돈을 보태 작가에게 남몰래 보냈다. 마음이 예술인 주인장 누님이다.
며칠 전 다른 지역에서 온 분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대전부르스와 주인장 누님을 소개했더니 모두 우리 동네에도 이런 술집과 주인이 필요하다며 아우성이다. 스마트폰이 범람하는 시대에 만나자는 약속없이 반가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남았으니 다행이련만, 사람은 그대로인데 없어진 옛 것들이 떠올라, 이 시대 우리는 더욱 외로운 모양이다.
수십 년 단골 헌책방을 잃었다. 단지 그것만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잃은 것은 헌책방이 아니라 만나서 반가운 사람들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울고 웃는 이야기를 시로 쓰고 싶다고, 우리는 헌책방에서 만난 그날, 건져올린 책들을 돌려보며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제 대전부르스에서 시를 쓰는 사람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거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래도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그때와 별다르지 않다. 같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기분이 좋고 안주를 먹지 않아도 배가 그득하다.
다행이었다. 그때 대전부르스를 만날 수 있어서.
김희정 대전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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