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식 논설실장 |
몇 해 전 일이다. 국내 대학 화장실에 생리대를 무료 비치한다고 하자 발칵 소동이 빚어졌다. 남자 화장실 면도기 비치를 요구하며 '역차별' 트집을 잡기도 했다. 사회비평가 카밀 패글리아의 이상한 글을 곱씹어본 건 그 무렵이다. “남성의 방뇨는 실로 우월한 호를 그리는 일종의 성취”라는 어마어마한 표현 말이다.
그 대척점에서 본 페미니스트이자 저널리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남자가 생리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부럽고도 자랑할 만한, 남성적인 일이 될 것이다. 남자들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그리고 많이 월경하는지 자랑삼아 떠들어댈 것이다. 의회는 국립월경불순연구기금을 조성하고 의사들은 심장마비보다 생리통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할 것이며 생리대는 (연방)정부가 무료로 나눠줄 것이다.'
말도 안 되지만 있을 법한 추측성 가정법이다. 권력 정당화에 월경을 어찌 이용하나 궁금하긴 하다. 더 궁금한 점은 딴 데 있다. 석기시대 여자보다 2~3배나 길게 왜 생리를 꼬박꼬박 치르며, 활쏘기에 거추장스러운 남자 가슴처럼 왜 퇴화시키지 못했나 하는 부분이다. 구구한 학술적 연구에서 요즘 꽂힌 가설이 있다.
다름이 아니고 하루빨리, 한시바삐 임신하고자 하는 여자의 바람(소망)이라는 이야기다. 임신 사실을 감지하는 모닝콜, 임신 중에도 연중무휴인 남자 인류의 접근을 차단할 경보장치, 무엇이건 그럴싸하다. 두더지에서 발견되는 처녀막도 유사한 기능이라는 비약을 곁들이며 '할머니 가설'까지 다시 꺼내본다. 할머니가 손자를 돌봐준 집안이 자녀를 더 출산한다는 탄자니아 원주민촌 사례였다. 할머니 입장에서 위험한 노산보다 손자 돌보기가 유전자 퍼뜨리기에 수월했고, 바로 이 생식 경쟁에서 뿌리깊은 '고부갈등설'이 흘러나온다. 동물 가운데 범고래도 비교적 젊어서 폐경을 겪고 다 큰 마마보이 새끼를 보살핀다.
단순히 폐경이 노화의 부산물이라는 시각이 있는데 보기 나름이다. 부르는 것도 그렇다. 폐경을 월경의 완성, 완경(完經)으로 고친다면 의료적 개입을 요하는 생리적 상태라는 시선이 다소 완화될지는 확실치 않다. 어떤 지방의회 의원은 듣기 거북하다며 생리대를 위생대로 부르자 한다. 월경에 대한 사회적 침묵의 이형태(異形態)이지 싶다. 무언 속에는 월경 자체를 거부하는 남자의 성적 판타지가 드문드문 섞여 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실제로는 아니다. 인식 면에서는 생리 중의 여성에게 화분 물을 못 주게 한 1940년대와 큰 차이가 없다. 심한 경우는 생리를 질병 취급하는 고대 로마사회에 딱 멈춰 선다. 성행위를 새 생명을 만드는 행위와 동일시한 전통사회의 정조관처럼 관념화된 구실도 있다. 이 대목에서 이재명 성남시장을 두고 가면 서운하다. “생리대가 수도, 전기처럼 공공재로 다뤄져야 한다”는 언급 때문이다. 똑똑한 이 시장이 생활필수품과 공공재 개념 하나 구분 못해 그러겠나. 거론하는 순간부터 억압된 상징체계와 싸우는 것 같다.
은연중에 매개·규제되고 통제받는 영역이란 뜻이다. 여기서 여성정책이나 젠더 연구의 영역, 거창한 지식사회학적인 월경, 월경의 정치학 담론에는 관여하지 않겠다. 지난 6·4 지방선거에서도 대전시 등 일부 지역 여성계가 저소득층 청소년 생리대 제공을 공약으로 제안했다. 대선 변수 가능성은 역시 완전한 0이지만 여학생 깔창 생리대의 비극은 사라지게 해야 한다. 번듯한 공약, 버젓한 정책이 아니어도 좋다.
최충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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