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태호 중부대 한국어학과 교수 |
하나, 임금께서는 가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세자빈 김씨는 압승이라고 해서 남자가 좋아하는 부인의 신발을 태워 가루로 만들어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요상한 방술을 시도하기도 했고, 또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여 퇴출시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세자빈 봉 씨는 거짓 임신도 하고, 소쌍이라고 하는 계집종과 성적인 관계를 맺어 내쫓았습니다. 며느리의 문란한 생활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으니 이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하나, 임금님께서는 지나치게 많은 후궁을 두었고, 너무나 많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18명의 아들들이 모두 출중하여 국사를 흔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22명의 아들이 세력을 다툰다면 후세에 손주가 명을 다 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소헌왕후로부터 8남2녀, 영빈 강씨로부터 아들 1명, 신빈 김씨로부터 아들 6명, 혜빈 양씨로부터 아들 3명, 숙원 이씨로부터 딸 1명, 송 씨와 딸 1명 등 18남 4녀를 두셨으니 참으로 다복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수양대군의 능력이 출중하여 손주(단종)가 제 명을 다 하지 못할까 몹시 두렵습니다.
하나, 대왕께서는 고려의 역사를 네 번이나 바꾸셨습니다. 임금님 3년(1421년)에 <개수 고려국사>를 완성하였으나 개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6년(1424년) 8월에 <수교 고려사>를 완성하였으나 다시 개수 명령을 내렸고, 24년(1442년) <고려사 전문>을 완성하였으나 반포를 중지하고 다시 개수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 후 31년 정월에 <고려사>를 다시 편찬하도록 하여 김종서 정인지 등이 <고려사>를 다시 편찬하였지요. 그것이 아드님인 문종 원년(1451년)에 완성되었고, 단종 2년(1454년 10월)에 반포되어 후세에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간(1424년)에 ‘용비어천가’찬술을 시작하였고, 1442년에 용비어천가를 완성하였습니다. 참으로 유치합니다. 조선건국의 정당성을 억지로 밝히려 조상을 신으로 만들었고, 고려의 왕들(우왕, 창왕)을 신돈의 후손으로 둔갑시키셨습니다. 조선창업은 정당하고 고려의 역사는 바꿔도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하나,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하실 때 문무백관들과는 의논하지 않고 초정리에서 급하게 통과시키셨습니다.(훈민정음반대상소문 중: 淸州椒水之幸 ···何獨於行在 而汲汲爲之) 나라의 중요한 일을 정할 때는 묻고 또 물어 보아 성현의 가르침을 기다렸어야 하는 것인데 행재소(임금이 임시로 거처하는 곳)에서 급하게 날치기로 처리하시면 후세에 뭐라 하겠습니까? 후세 국회의원들의 본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나, 할아버지께서 불교를 멀리 하라고 하셨는데, 궁궐 내에 내불당이라는 절을 지어 놓고, 훈민정음 연습한다는 핑계로 월인천강지곡이나 번역하고 있으니 할아버지께는 부끄럽지 않으신지요? 숭유억불하라는 태조의 말씀을 그리도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인지요?
신이 미숙한 문자로 죄를 기다리며 마음 속에 있는 말을 침묵하지 못하고 풀어 놓았습니다. 임금님께서는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후대에 하는 일이다.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불만이 많다. 국사교과서의 문제도 그렇고, 세월호 사건도 그렇다. 세종대왕을 현대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몹시 독단적이고, 여성편력이 강한 정치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이 바로 서고 발전하는 과정에는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세종대왕의 삶의 모습에는 독선적인 면도 있고, 성군의 모습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세종대왕을 모두 성군으로 추존하고 있다. 역사의 이면에는 항상 시대가 도외시했던 아픈 사연도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아픈 시대를 살고 있다. 평가는 후세에 맡기고 아름다운 오늘을 만들었으면 하는 소망에서 역사의 이면보기를 시도해 보았다.)
최태호 중부대 한국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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