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만 배재대 교수 |
나와 네가 어우러져 조화롭게 살아가는 공간이 지구촌이자 우리네 사회이다. 작금의 세계는 어떠한가? 안팎으로 대국굴기로 새로운 질서재편에 골몰하는 모습이다. 새해에는 새로운 동맹과 새로운 협력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만큼 우리도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숙고하고 극복해야 할 시점이다.
바깥을 훑어보자. 탄탄하게 승승장구할 것 같던 유럽연합도 브렉시트 같은 악재가 터지면서 ‘더불어’가 아닌 ‘나부터’ 챙기는 식의 균열을 맞고 있다. 게다가 미국은 시장경제의 총아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자국 우선주의’를 주창하며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심기를 건드려 우리의 대외정세도 이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내부를 들여다보자. 정유년하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기억된다. 모두 징조가 있었고 예측 가능했기에 대비할 수 있었지만 협력과 합의보다는 분열과 내분으로 국토가 유린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은 1592년에 발발해 1598년까지 지속되면서 동북아 3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대란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제1차 침략은 임진왜란으로, 제2차 침략은 1597년 정유년 8월 20일에 재발해서 정유재란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당시 조선은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이이의 의견은 묵살되고 붕당으로 나눠져 사사건건 대립하던 혼탁한 시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0여 년에 걸친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 일본을 완성한 후 1592년에 ‘가도입명’을 구실로 부산을 침략한다. 침략 이전에 선조는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정보를 입수하고 통신사로 황윤길과 김성일을 사절단으로 보내 동향을 살핀다.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충언하지만 동인인 김성일은 그럴 가능성이 낮으니 전쟁준비가 불필요하다고 간언한다. 선조는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의 말만을 받아들여 전란의 불씨를 키운다.
이렇게 발발한 왜란도 명제국과 일본과의 종전강화조건(조선 8도 중 4도 이양 등)이 결렬된다. 그걸 빌미로 히데요시는 1597년 8월 20일에 조선의 남부점령을 목표로 재침략한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히데요시에게는 대군을 조선 남부에 상륙시킬 때 큰 걸림돌로 작용한 것이 이순신과 조선수군이었다. 이순신은 9월 16일에 그 유명한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칠천량 해전 당시 역모의 모함(유키나가의 이중간첩, 서인과 원균의 탐욕, 선조의 무능)으로 파직된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거둔 승리였다. 칠천량 패전(1597년 7월16일) 후 선조가 결단한 것은 조선수군 폐지론이었지만, 수군폐지불가론을 옹호하며 백의종군한 이순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승리였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비선실세 무리들은 도둑놈이 몽둥이 들고 길 위에 오른 듯 파렴치하게 우리 사회를 쥐락펴락했고, 국가를 통치해야 할 대통령은 국회에서 탄핵됐다. 금수저가 아니라면, 흙수저이거나 무수저라면 사람대접도 올바로 받지 못할 그런 사회로 바뀌었다. 이렇듯 여러 무리들로 나눠서 치고받는 형국이 임진왜란 즈음의 붕당정치 시대를 닮았다. 복잡하게 얽힌 강대국 간의 당리당략에 휘둘리며 휘청거리는 우리네 모습도 그때와 판박이다. 난세의 영웅은 찾을 길은 없고 사리사욕에 눈먼 간신만 설치는 형국이다.
이런 난세에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줄탁동시’의 정신이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누구나 장점과 단점은 동시에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남의 장점은 외면하면서 단점만 보고 교만하고 방심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도태되고 낙오되고 소외당할 것이다. 사제간의 인연이 어느 기회에 딱 맞아떨어지듯이, 행복한 가정도 원칙 있는 사회도 서로 줄탁동시를 할 때 만들어지고, 난세를 구할 인재도 사제간에 줄탁동시를 할 때 탄생하고, 건실한 기업도 동료 간에 줄탁동시를 할 때 승승장구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팎으로 시달리고 있는 우리 사회도 줄탁동시의 이치를 공유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더불어 노력할 때 희망찬 새해 일출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만 배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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