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식 논설실장 |
기억을 더듬어보니 2002년 월드컵 단어장에는 '황선홍'이 있었다. 붉은 악마 티셔츠 차림으로 출근해도 아무렇지 않은 그 시절, 형용사화(化) 접미사가 이름에 곧잘 나붙었다. 예를 들면 형용사 '황선홍스럽다'는 '최후의 멋진 한 방을 날리는 멋쟁이'다. 조직과 개인의 명예를 위해 몸 아끼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불러줬다. '이임생스럽다'가 동의어였다. '공수에 능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라는 '유상철스럽다'도 있었다.
그 뒤로도 많은 '-스럽다'가 명멸했다. 회창스럽다, 도올스럽다, 안철수스럽다. 검사스럽다, 의원스럽다 등으로 줄을 이었다. '이명박스럽다'도 있었다. 되는 일 없고 하는 일마다 꼬인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남에게 떠넘긴다. 부정 일색이었다. '변명+반박=명박'의 무리한 조어법까지 등장했다. 편의점 업계에는 '혜자스럽다'와 '창렬스럽다'가 유행한다. 음식이 양질 면에서 좋고 나쁨을 그렇게 불러 본의 아니게 연예인 이미지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
이런 게 바로 혼자만의 생각[뇌]을 공식적인[오피셜] 사실로 믿는 '뇌피셜'일 것이다. 언어를 각자의 혼이 안치된 사원(寺院)으로 보면, 혼이 거꾸로 박혔다. 걸쌈스럽고(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억척스럽고) 사박스럽고(독살스럽고 당돌하고) 몽짜스럽고(겉은 어리석은 체하나 속엔 딴 생각을 품고) 소사스럽고(간사하고 좀스럽고) 이물스럽다(음험하여 측량하기 어렵다). 진실이 드러나기 전까지 거짓이 활개를 친다던가. 그러나 그들을 지칭하는 형용사들에 국민은 울화가 치민다.
한국어는 형용사가 발달해 어간에 어미가 붙어 다양한 말을 양산한다. 이름에 붙어 특질을 나타내는 형용사는 영어라고 없지는 않다. 빅토리안(Victorian), 프로이디안(Freudian), 케인시안(Keynesian) 등이 그것이다. '빅토리안'은 '고상한 체하기와 인습의 고수'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바람둥이였다. 프로이트에서 나온 '프로이디안'은 '무의식적으로 성적인'이다. 마키아벨리는 더 억울하다. 그는 '마키아벨리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우병우스럽다'는 '똑똑하나 인간성이 별로다', '기춘스럽다'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다'로 쓰자고 제안하지만 이미 그 이상으로 쓰인다.
알려진 바로는 문법적 '활용'과 크게 다른 삶을 산 것 같지는 않다. 비선 실세 '최순실'이 무의식적 문화코드가 된 것은 한 나라의 불행이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든 한 해와 차라리 결별하면 좋겠다. 정유년 새해에는 형용사를 오염시키는 삿된 이름과 헛된 이미지가 양산되지 않기를, 특히 '순실스럽지' 않기를 기도한다. 말이 세상을 아프게 한 2016년 세밑에서 언어가 문화의 반영물임을 몹시 아프게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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