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정 대전작가회의 회장 |
몇 주 전 아침 일찍 지인의 모친상 소식을 듣고 경북 영주의 상갓집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미술대 학장을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분 말씀이 요즘 미술에는 시詩가 없어 재미도 없고 깊이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시를 읽지 않고 예술의 여러 장르가 창작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예술은 기술을 가진 장인들과 달리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든다면 문예창작학과에 소설을 쓰기위해서 온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매일 소설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나머지 장르는 등한시 한다면 어떻게 될까. 소설가의 길을 가려면 시도 평론도 희곡도 수필도 소설 못지않게 중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문학 전반에 대한 관심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 문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을 보면 소설을 전공한다면서 시를 읽지 않고 다른 장르에 관심을 쏟지 않는 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나 더 경험담을 옮겨본다면 오랫동안 인물화를 그려온 화가인데 요즈음 예술이 재미가 없는 이유는 동락同이 부족해서란다.
두 분 이야기의 핵심은 교류가 없다는 뜻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부터 예술이 하나하나 잘게 부셔졌을까. 문학, 미술, 음악, 연극을 열어보면 그 맥의 중심에 문학이 흐르고 있다. 문학이 하는 일은 예술의 근간이 되어 음악을 더 아름답게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림을 더 즐겁게 바라볼 수 있는 조력자 역할도 하고 있다. 연극은 말할 것도 없이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만들어 진다.
매년 노벨상 소식이 발표되면 과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말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기초과학에 대한 우려이다. 어느 나라에서 상을 받으면 단골메뉴처럼 나오는 것이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현실이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지만 우려 수준을 넘지 못한 채 변화의 조짐조차 찾을 수 없다.
누구를 탓해야 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뿌리가 깊지 않으면 바람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예술 역시 마찬가지다. 예술의 근간인 문학이 고사위기에 처해 있다.
필자 역시 20년 넘게 문단에 발을 들여놓고 있어 지탄의 대상임을 밝힌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 다 같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그 교수님의 말씀처럼 그림에 시가 없어 재미가 없고 작품을 표현하는데 깊이가 부족하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말이다. 자신만의 즐거움에 빠져 동락(同)을 하지 못하는 문학 역시 반성에서 예외일 수 없다.
예술은 함께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 진다.
공유라는 것은 동락을 동반할 때 반응도 좋고 생명력도 오래 머물 수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휠세”의 세종대왕의 말씀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요즘 예술의 깊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근본적인 이유 하나를 이야기 한다면 예술의 장르가 함께 어울리지 않고 독자생존 방식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더불어 문학을 등한시 하고 시(詩)가 어느 왕조의 유물이냐며 묻는 사람들 조차 없다는 것이 더 씁쓸한 작금의 현실이다. 굳이 누군가를 탓해야 한다면 그 첫 주자는 바로 나다. 문학으로 밥벌이도 못하지만 아직도 문학의 언저리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으니까 말이다.
김희정 대전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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