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승 대전대 교수 |
조선 9대 임금이었던 성종은 선비 복장으로 경호원 두어 명만 데리고 백성들의 삶을 둘러보는 미행(微行)을 즐겼다고 한다. 미행이란 왕이 평복을 하고 민가를 돌면서 백성의 삶을 살피는 것을 말한다. 미행을 통해 효자, 효녀의 일화가 알려지기도 하고, 인재를 발굴하기도 하는 등 많은 미행일화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요즘도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이 민정시찰, 민생탐방, 민생투어 등의 이름으로 국민들의 삶 가까이 다가가려는 행보를 보이곤 한다. 그러나 임금이 경호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 동행한 채 몰래 백성의 삶을 살펴보고자 했던 미행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기자들이 동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행원들도 대거 따라다닌다. 대통령이나 지방자치 단체장들이 명절이나 선거를 며칠 앞두고 전통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상인들과 악수를 하고, '경기가 좀 어떻습니까?', '힘내시기 바랍니다.'는 등 몇 마디 건네는 모습이 TV뉴스에 방영될 때 전혀 감동을 전해주지 않는다. 이런 형식적인 시찰이나 탐방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이런 뉴스를 접할 때면 학창시절 장학사 검열이 있기 전 학교에서 벌어졌던 한 바탕 소동이 떠오른다. 전교생이 마룻바닥을 광이 나도록 쓸고 닦고, 운동장, 교실, 화단, 창고 등 학교 구석구석 청소를 했다. 필자는 청소를 하면서 학교에 과학실이라는 곳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과학실에서 수업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참관수업 시간에는, 사전에 준비된 시나리오에 따라 선생님의 질문에 공부 잘하는 학생이 미리 준비한 답변을 했다. 엉성한 시나리오에 따라 어설픈 배우들이 연기하는 초짜들의 연극을 보는 듯 했다. 얼마 전부터 내년 대권을 노리는 대선주자들의 민생현장 탐방 행보가 언론에 종종 소개되고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는 전남 해남을 시작으로 전국 구석구석을 누비며 국민들을 만났다고 한다. 탐방 중에 그는 축산 농가에서 소에게 여물을 주고 옥수수 직판장에서 옥수수 포장 작업을 했다. 신안에서는 염전체험도 하고 부안에서는 콤바인을 운전하기도 했단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 또한 히말라야를 한 달 간 방문하고, 독도를 찾아 경비대원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들은 각종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행적을 알리며 국민의 삶을 체험하고 민심을 헤아리게 되었다는 감회를 전한다.
이런 현장체험 소식이 전해질 때 각종 포털사이트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반응이 격렬하다. “어설픈 세상에 몰려 댕기는 보여주기 쌩쑈 프로그램 보다는 똑똑한 정치를 …” “국민을 얕잡아 보는 코스프레” “지겨운 정치쇼 이제 그만” “평소에 버스타고 지하철타고 다니면 무슨 민생탐방이 필요해?”
대개 냉소적인 댓글이 많다. '서민 코스프레'라는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민심을 탐방해야만 알 수 있다면, “(대권주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다는 긍정적 평가도 없지는 않지만 꼭 민생탐방이라는 이벤트를 통해서만 민심을 읽을 수 있을까? 민심이라는 것이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일상에서 국민의 삶 가까이 있으면 굳이 의도적으로 탐방을 하지 않더라도 민심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에 지역에 있는 식당이나 포장마차만 다녀도, 버스나 지하철만 타고 다녀도 시민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세종시 고위 공무원들의 절간(?) 행정 뉴스와 대권주자들의 민생탐방 소식을 접하면서 소통의 접점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진정 국민의 삶에 다가가 그들의 애환과 고충에 가슴을 열고 쓴 소리에 귀 기울이며, 이를 정책에 반영하려 애쓰는 지도자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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