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점심 즈음 계룡산 동학사 한 펜션. ‘밥’이 아닌 ‘식사’를 맛있게 하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군대 구호를 외치듯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어리둥절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고등학생처럼 어려 보이는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모두 여드름이 막 돋았거나 뽀얀 피부의 앳된 얼굴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이들이 나눈 대화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재판’, ‘전과’, ‘혐의’, ‘기소’, ‘구속’ 등 법률용어들이 잇달아 튀어나왔다.
이야기는 막힘이 없었다. “그 형 재판 날짜가 언제였지?”, “2심 기다려봐야지 뭐”, “기소유예를 받을 것 같다”는 등 그 나이 또래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밥보다 식사가, 언어·수학보다 법이 익숙한 이들은 누굴까. 이 아이들은 대전가정법원에서 소년보호사건으로 심리를 받고 있는 청소년들이다.
절도, 폭행, 무면허운전 등 재판을 받는 이유도 다양하다.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문제아’라는 꼬리표를 달아줬다. 하지만 이 친구들은 자신들에게 달린 꼬리표를 떼기 위해 이날 모였다.
보호소년들의 자기반성과 성장을 돕기 위한 대전가정법원 ‘2016 길 위의 학교’가 14박15일의 일정에 돌입했다. 길 위의 학교는 지리산 둘레길(240km)을 걸으며 보호소년들이 긍정적인 삶의 의지를 찾도록 도와주는 교정복지 프로그램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외적강제가 아닌 스스로 자기극기, 자기통제, 자긍심, 책임감 등을 깨닫는 내적강화 방식이다. 핸드폰 사용은 금지되며, 말은 되도록 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묵언수행’이다.
보호소년 9명과 청소년 관련 기관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일대일로 동행한다. 이들은 3개조로 나눠 하루 평균 20~30km씩 10일간 행군한다.
이날은 본격적인 행군에 앞서 준비캠프가 열렸다. 9명의 보호소년과 이들의 동행자가 인사를 나누고 등산화와 가방 등 트레킹 장비를 점검했다. 분노조절프로그램도 받고, 족구도 한 게임했다.
14일엔 계룡산에도 오른다. 사전 체력 점검을 위해서다. 아이들은 ‘원빈’, ‘강동원’, ‘덕배’, ‘랑이’ 등 서로에게 별명을 지어주며 친목을 다졌다.
9박 10일간 240km의 강행군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들은 걱정하면서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B(21)씨는 “힘들어도 친구들과 함께 걸으면 재미있을 것 같고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A(19)군은 “다음달 검정고시 시험이 있는데 지리산 둘레길을 다녀오고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했다.
C(19)군은 “막막하지만 그래도 묵묵히 걸어야 하지 않겠냐”며 “이번 행군으로 뭐든 얻어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프로그램 총괄단장인 대전청소년드롭인센터 이계석 소장은 “아이들은 여러 이유로 범죄를 저질렀지만 반성하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충분한 기회와 그 가치가 있다”며 “지리산 둘레길이라는 새로운 공간과 환경 속에서 자신을 발견해 건강한 사회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밝혔다. 송익준 기자 igjunba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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