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적봉을 오르는 길에 자리잡은 백련사 설경 |
겨울의 게으름을 떨치듯 오른 산,
깨질 듯이 시려웠던 손발은 호되게 치르는 겨울과의 이별…
살기위해 매일을 견뎌내는 우리는 욕망과 자아와 감정에 휘둘리지만
모든 것은 순리대로, 눈송이는 아무 노력없이 떨어진다
“무주 구천동 주세요.”, “어머, 덕유산 가시나봐요. 오늘 눈 와서 산에 가면 정말 멋지겠어요.” 꼭두새벽 휴대전화 알람소리에 화들짝 깨어 비몽사몽으로 화장도 안하고 온 몸을 중무장하고 나선 덕유산행. 터미널 매표원의 상냥한 미소와 격려에 잠이 확 달아나며 설레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 제대로 겨울의 덕유산과 랑데부하겠구나. 겨우내 비염이 있다는 이유로 산을 찾지 않았다. 보문산만 왔다갔다 했다. 에베레스트든 몽블랑이든, 보문산이든 어떤 산이 훌륭하고 시시한 건 아니다. 산은 다 같은 산이다. 그래도 이번 겨울엔 너무 게으름을 피웠다. 해서 히말라야는 못 가더라도 겨울이 가기 전에 설경을 맘껏 감상할 수 있는 겨울산을 가야겠다고 맘먹었다. 이름하여 이번 겨울과의 화끈한 이별식을 덕유산에서 치를 참이다.
이른 아침 구천동 마을은 집앞 눈을 치우는 주민들의 숨찬 소리만이 간간이 들렸다. 서울, 대구, 전주 등 전국 각지에서 왔다는 한 무리의 등산동호회 사람들이 지나가는 나더러 사진 한방 찍어달라고 하고선 혼자 왔냐며 눈이 뚱그래진다. 사람들의 반응에 늘 하는 생각이지만 혼자 산에 가는 게, 혼자 여행하는 게 신기한가. 버스정류소에서 백련사까지 평소 같으면 1시간 걸리는데 눈길을 걷느라 20분이나 초과했다. 적막감이 감도는 백련사는 발자국만 길을 내고 있을 뿐 눈조차 숨죽이며 내린다. 이제 끝없이 오르고 올라야 한다. 삶과 죽음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듯 산을 오르는 행위도 개인적인 것이다. '산을 왜 오르는가'라는 진부한 질문에 '산이 거기 있으니까 간다'는 답도 이제 식상한 언사가 돼버렸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노동에서 헤어날 수 없다.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인간에게 먹고 사는 일만큼 중요한 게 어딨겠나. 더구나 약육강식의 경쟁사회에서 하루하루 살아내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1614m의 향적봉에서 바라본 산아래 세상은 망망대해 아득한 바다였다. 몇 미터 앞만 분간할 수 있을 뿐, 하늘도 땅도 온통 눈과 안개에 휩싸여 유령도시를 떠올리게 했다. 순백의 순결한 세계는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킨다. 대피소에서 컵라면과 김밥을 먹고 산을 내려오는데 손발이 깨질듯이 시려웠다. 순간 눈물이 쑥 빠졌다. 내가 겨울과의 이별식을 호되게 치르는구나. 마흔 살의 짧은 나이를 불꽃처럼 살다 간 잭 런던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자연의 냉혹함이다. 그의 소설들은 생존투쟁에 매혹을 느끼며 그 냉혹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에게 자연은 '핏빛 이빨과 발톱'이었다. 그 중 '불을 지피다'는 영하 50도의 혹한에 맞서 싸우다 허망하게 죽는 인간을 담담하고 냉정하게 그렸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죽은 말의 배를 갈라 내장을 긁어내고 그 속에 들어가 하룻밤을 버티며 살아냈지만, 런던의 소설 속 주인공은 설원에서 결국 불을 지피지 못하고 대자연에 항복했다. 나는 얼어죽을 일은 없겠지만 미끄러운 눈길을 내려오면서 몇 번이나 고꾸라질 뻔 할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는길=대전복합터미널에서 무주구천동 가는 버스는 첫차가 7시 20분이고 하루 5번 간다. 1시간 40분 소요. 승용차로는 대진고속도로 무주IC에서 좌회전해서 구천동방향으로 가면 된다.
▲먹거리=향적봉까지 갔다 올 경우 도시락을 싸가는 게 좋다. 시간이 꽤 걸린다. 정상에 대피소가 있어 라면 과자 등도 판다. 구천동엔 식당들이 있어 산채비빔밥, 청국장 등 맛집이 많다.
글·사진=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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