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취상태의 30대 남성이 지역 A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다. 술자리 시비로 한바탕 싸움을 벌여 얼굴에 피가 흥건했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 혼잣말로 “다 죽여야 한다”며 중얼거렸다. 간호사가 인적사항을 묻자 그는 갑자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남성은 고성을 지르며 의료진에게 주먹을 내지르고 발길질을 하는 등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2. 30대 부모가 5살 아이를 안고 지역 B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아이의 발열증세가 걱정됐기 때문이다. 이 부모는 다짜고짜 반말과 욕설을 섞어 의료진에게 진료를 요구했다. 이들은 열을 내리기 위해 주사를 놓으려는 간호사에게 “제대로 못 놓으면 눈깔을 뽑아버리겠다”, “다리를 부러뜨리겠다”는 등의 폭언을 퍼부었다.
의료진의 몸과 마음이 환자나 보호자의 무차별 폭행과 폭언에 멍들고 있다. 이 같은 문제는 어제오늘일이 아니지만, 폭행수위가 높아지거나 입에 담기 힘든 폭언으로 점점 발전해 대책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대한응급의학회의 '응급실 폭력과 폭행 대응의 이해와 변호 조사'를 보면, 2013년 기준 응급의학과 전공의 236명 중 218명(92.4%)이 “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유형별로는 언어폭력이 201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신체적 위협(140명), 신체적 폭행(59명) 순이었다(복수 선택).
실제 지역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료진들도 일주일에 1~3번은 언어폭력을 당하거나 목격한다고 말한다. 올해 대표적인 응급실 폭행으로는 지난 7월 경기 중앙성모병원에서 만취자가 야간 당직의사를 구타한 사건을 들 수 있다. 같은 달 세종의 한 병원 응급실에선 40대 남성이 간호사를 흉기로 위협하며 인질극까지 벌였다.
더 심각한 점은 의료진 폭행이 응급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엔 일반 병의원을 찾은 환자·보호자들도 폭행과 폭언을 일삼고 있다.
현행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응급의료를 방해하거나 의료용 시설 등을 파괴·손상 또는 점거한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하지만 폭언·폭행을 당한 의료진 대부분은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지 않는다.
경찰이 병원과 환자간의 문제로 인식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한다고 생각해서다. 또 병원이 평판 때문에 조용히 합의하거나 당사자에게 처리를 전적으로 맡겨 '참고 말자'는 경우가 많다.
병의원 등에서 근무하는 보건의료인을 보호하는 법안은 아직 없어 일선 의료인들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다.
의료인 폭행 처벌 범위를 응급실뿐만 아니라 의료현장 전체로 확대하는 '의료인폭행방지법'이 상정됐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심사 안건 목록에도 들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의료인 폭행방지법의 조속한 제정과 병원의 적극적인 법적 대응 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충남대병원 유인술 응급의학과 교수는 “의료진 폭행은 의료인 당사자의 안전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진료권을 빼앗는 범죄행위”라며 “이를 강력히 처벌할 수 있는 의료인 폭행방지법과 같은 법적 근거 마련이 시급하며, 병원은 법무담당자를 지정해 법적인 대응에도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송익준 기자 igjunba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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