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동양화 6대가 중 한명인 심향 박승무가 생애 마지막 23년동안 작업에 전념했던 대흥동 자택의 모습. 모텔촌 좁은 골목길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다 관리마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심향 박승무 선생 대전 생가터'라는 안내현수막이 무색하다<사진 왼쪽>. 심향 박승무 선생의 생전 작업 중인 모습. |
심향 박승무. 근대 동양화 6대가 중 한명으로, 한국 미술계의 거목이다. 부드러운 필치로 크고 작은 미점을 구사한 설경과 절제된 묵화는 그만의 독창성이다. 옥천 출생인 심향 선생은 대전과도 인연이 깊다. 1980년 보문산 뒤편에 혼을 묻기 전까지 생애 마지막 23년을 대흥동에서 야인으로 작업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심향 선생을 기리고, 대표 인물로 부각하기 위한 지역의 노력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지난 2004년부터 심향선양위원회가 세미나와 추모 전시회 개최, 평전 발간 등 심향 선생의 맥을 잇고 있지만, 대중과 지자체의 낮은 관심과 부족한 예산 탓에 어려움이 크다.
심향 선생의 대흥동 자택은 모텔촌 사이에 버려져있고, 묘소도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고 있다. 대흥동 자택은 심향 선생이 한국적 자연을 자신의 관념에 도입해 독자세계를 구축한 곳으로 그 의미가 작지 않은 곳이다.
23일 찾은 심향 선생의 자택(중구 대흥동 49-25번지)은 충무네거리 근처 모텔촌 좁은 골목길 안에 숨어있었다. 자택 앞뒤로 모텔이 들어서있었고, 주변에는 인근 주민들이 버린 것으로 보이는 음식물쓰레기와 포장용기들이 널려있었다. 이곳이 심향 선생의 자택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은 '심향 박승무 선생 대전 생가터'라는 작은 현수막 뿐이었다. 이마저도 언제 부착했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색이 바래있었다.
현재 자택은 일반 가정집으로 쓰이고 있다. 차고나 창고로 이용하는 듯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자택 옆 모텔에 올라 내려다보니 1층 건물에 컨테이너 박스로 옆 공간과 2층을 확장한 구조였다.
지역 미술계를 중심으로 뜻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자택을 심향의 삶을 조명하는 조그만 전시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중구청이 자택을 매입해 미술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려 했으나 예산부족에다 주변 환경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흐지부지됐다.
보문산 뒷자락 중구 목달동에 자리한 심향 선생의 묘소 상황도 마찬가지다. 묘소를 관리하던 심향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처조카는 그 땅을 팔고 잠적해버렸다. 당시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지만, 현재 집주인이 추모제가 열리는 7월 25일 전에 제초작업을 해줘 그나마 관리가 이뤄지는 상황이다.
지역 문화계에선 심향 선생에 대한 재조명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대전과 충청을 대표하는, 한국 미술계의 대가로서 높은 인지도를 가졌음에도 지역차원에서의 관심과 지원 사업이 없어 잊혀만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재호 한남대 미술학부 교수는 “옥천 출생인 심향 선생은 지난 1957년 대전 대흥동으로 내려와 23년간 지역 미술계에 큰 획을 그은 근대 동양화의 대가임에도 지역 차원에서의 관심은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며 “자택에 유품 등을 전시해 그가 거주하며 작업했던 곳임을 알려야하고, 묘소의 체계적인 관리와 함께 주변을 문화예술공간로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심향 박승무는 1893년 8월 26일 옥천 군북면 국원리에서 태어났다. 일본과 상해, 용정 등 해외에서도 활동했다. 작품 완성기인 생애 말년의 23년 동안 대전 대흥동에서 작업에 전념하다 1980년 7월 25일 타계했다.
송익준 기자 igjunba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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