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창원 단장은… 1959년 1월 27일생. 고려대 농학과. South Dakota State University, Brookings, South Dakota, USA 석사. Virginia Polytechnic Institute&State University, Blacksburg, Virginia, USA 박사. 배재대 생물의약학과 학과장. 충남 농업기술원 토마토시험장 산학협력단 전문기술위원. 충청광역권 선도지원단 프로젝트 지렉터, 배재대 중소기업산학렵력센터장 역임. 2015년 1월부터 배재대 산학렵력단장 재직. |
한가지 일에 몰두하면 끝까지 파고 보는 성격은 실험실 생활에 맞았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미국에서 10년간 유학을 하면서 스스로 연구하고, 개발했던 실험실 경험은 농업에서 의학까지 생명과학을 넘나들수 있을 정도의 사고의 유연함을 갖게 하는 자산이 됐다.
1년간의 안식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지난 1월 산학 협력단장으로 임명돼 눈코 뜰새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학자는 글로 남아야 학자라며 여전히 실험실 운영과 연구 활동도 손에 놓지 못한다.
최창원 배재대 산학협력단장을 만나 그만의 교육철학과 대학들의 위기타개책의 한 해법으로 꼽히는 산학협력의 방향을 알아본다. <편집자 주>
▲연구자의 길은 내 운명=최 단장은 본인을 스스로 '연구자'라고 말한다. 학부에서 농업을, 유학을 가서는 식물 바이러스 병리학을 전공한 최 단장은 농업수산에서 축산, 의학과 약학까지 생명과학에 관한한은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동물과 식물 분야을 넘나드는 것은 기본이다.
“의학이든 농업이든 간에 생명 공학적 개념과 산업 쪽으로 응용이 가능한 분야라면 지금도 도전하고 있다”고 말하는 최 단장이 원래부터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 들어갈 때까지는 (연구가)관심이 없었어요. 졸업해서 취업하면 되겠다 생각해서 공부를 안한거죠.”
공부보다는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놀고, 운동하는 것을 더 좋아했던 탓에 동기들이 모두 다 졸업하고 취업을 나가는 동안 한 학기를 더 학교에 다녀야 했다. “대부분 동기들이 4학년 2학기때는 취업을 나간다고 수업을 듣지 않으니, 제겐 4학년 2학기부터 1년이란 시간이 주어졌어요.”
혼자 남은 학교 생활은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자마자 단과대 도서실에 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전공분야를 공부하려면 다시 영어를 시작해야 했는데 마음을 고쳐잡은 1년간 그가 공부한 연습량은 트럭 한대에 폐지를 실을 수 있을 만큼 엄청났다. 한 곳에 흥미를 느끼면 몰입해 버리는 장점이자 단점인 그의 성격은 실험실 생활에서 빛을 발휘한 셈이다.
대학원에서 실험실 생활을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교수직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우스 다코타 주립대학교(South Dakota State University)에서 석사를, 6개월의 군대 생활을 마치고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학교(Virginia Polytech Institute& State University)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했다.
▲치열한 연구실 생활=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지금 최 단장에게 많은 자산이 된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박사 과정을 공부했던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에서의 유학 생활은 오늘날의 그를 있게 만든 시간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지도교수님이 워낙 유명하셨던 분이었는데, 연방정부나 국무성 등 각종 분야에서 자문활동을 하시다 보니 1년에 4개월 정도는 출장을 다니셔야 했어요.”
4년 넘게 공부를 하면서 유명한 교수님께 많이 배운 점도 많았지만 실험은 이방 저방 돌아다니면서 테크닉을 배워 스스로 해내야 했다.
“당시에는 분자생물학이 태동하던 시기여서, 어떤 분야에서든 분자 생물학이 접목되던 시기였어요. 기본적으로 공통으로 할수 있는 분야가 있었죠. 그래서 다른 실험실에서 배우고, 제 실험에 활용하고 그랬죠.”
대부분의 유명 실험실이 시스템에 맞춰 진행하는 것을 감안하면 학생 스스로 연구법을 배워 실험을 해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배우고, 연구하고 개발했던 경험은 농업에서 의학까지 전방위를 넘나 들며 연구할수 있는 자산이 됐다.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문헌을 찾거나 실험도구들을 만들어 실험 생활을 했다.
“편안한 환경에서 자란게 아니라 광해에서 살아 남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여러가지 연구를 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된 것이 아닌가 해요.”
▲산학협력에 관심=최 단장이 산학협력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연구와 맞닿아 있다.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교육부 과제가 아니면 모든 과제의 내용에 사업화와 산업화, 상품화가 들어가야 연구비를 지원받을수 있게 됐어요. 그래서 제가 한 과제 대부분이 산학 과제가 돼 버렸어요.”
산업과 연구를 접목한 과제를 수행했던 터에 산학협력단은 어찌보면 그에게 딱 맞는 보직인 셈이다. 산학협력단장을 맡기 전에도 최 단장은 산학협력센터장을 맡아 산학협력센터가 대통령 표창을 받는 등 명실공히 산학협력에 있어서 만큼은 최고다.
지난해 9월부터 1년간 안식년을 신청했었지만 “지금은 학교가 중요한 시기”라는 김영호 총장의 전화에 3개월만에 안식년을 중단하고 학교로 복귀했다.
“1~2월에 3건이 굵직한 사업들 공모가 있어서 연초부터 정신이 없었어요.”
교수 개개인의 프로젝트는 자체적으로 추진하지만 중대형의 사업의 경우 최 단장이 결정하고 추진해야 한다. 중요한 시기에 중책을 맡았지만 최 단장 만한 사람이 없다는 평가는 누구나 공감했다.
산학협력단을 이끌면서 최 단장은 대전의 토대는 좋은편이라고 말한다. “대전은 연구 개발 특구가 있고, 벤처 회사들이 생겨난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모델 케이스예요. 산학 여건이 많이 이뤄지는 편이구요.”
최 단장이 맡고 있는 배재대 산학협력단은 이같은 대전의 인프라에 가장 잘 부합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최 단장은 “대전시는 많은 사업을 기획하는데 미래에서 살아남으려면 지금 잘되고 있는 분야를 중점적으로 특성화 시켜야지, 이것저것 다 된다고 밀면 그저 그런 수준으로 밖에 갈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제자들아, 최선을 다해달라”=최 단장의 인생 전반은 전력 질주로 살아온 것처럼 늘 치열했다.
그럼에도 그는 학부시절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던 후회는 강단에서 제자들에게 “최선을 다해달라”는 당부로 이어졌다.
“학생들에게 공부를 안하려고 마음 먹었다면 사회 나가서 필요한 한가지는 열심히 하라고 말해요. 영어가 됐든, 요리가 됐든. 저는 대학생활을 허무하게 보냈으니까 반복되지 않게 끔 최선을 다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러한 가치관을 그는 몸소 실천한다. 단장일을 맡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실험실 운영을 위해 2~3일 밤을 꼬박 새워 핵심 연구과제 계획서를 제출했다. 굵직굵직한 산단일을 추진하면서도 국제 저널 에디터 일도 맡고 있다.
“살아 남자는 생각으로 살고 있어요. 제 예전 석사때 교수님인 웨인 가드너(Wagne S.Gardner)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이 '퍼블리시 오어 페리시(Publish or perish, 논문 발표를 하지 않고는 소멸한다. 즉 학문적 업적 없으면 퇴출당한다)'란 말을 써주셨어요. 순간 깜짝 놀랐어요. 이게 미국 학자들의 생각이구나 싶었죠.”
은퇴 직전까지 자신의 실험은 직접 본인이 다 하셨던 웨인 가드너 교수의 말은 학자이자 연구자로서 최 단장의 삶의 지표로 남아 있다.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학자라고 말하지만 학자는 글로 남아야 학자이지, 그렇지 않으면 학자라 할 수가 없어요. 지금 교수들이 연구를 안하는 풍토가 만연돼 있으니, 글을 안쓰면 연구비를 따기 더 힘들어 지고,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어요. 안타깝습니다.”
스스로를 연구자라고 말하는 최 단장.
유학생활에서부터 강단, 그리고 실험실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최 단장은 몸소 현재 위기속의 대학이 나아갈 길에 대한 해법을 던져주고 있다.
대담·정리=오희룡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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