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나이가 드는 일은 나무와 같아야 한다고 한다. 해를 더할수록 더욱 울창해지는 나무처럼, 해마다 더 풍성한 그늘로 자신과 주변 사람들까지 넉넉하게 보듬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949년생. 6·25 전쟁의 아픔과 전후의 혼란했던 시대를 온 몸으로 겪어내며 살아왔지만 유재욱(66) 오성철강(주) 회장은 '늘푸른 나무'처럼 넉넉하다. 미소 띤 모습 속엔 삶의 내공과 여유가 엿보이고 이웃을 위한 나눔과 봉사에도 수십년을 변함없는 모습으로 한결같이 임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대전 아너소사이어티클럽에 34호 회원으로 가입한 유재욱 회장을 최근 대덕구 읍내동 오성철강 회장실에서 만나 이웃과 함께 베풀면서 살아온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주>
▲대전아너소사이어티클럽 34호… 아낌없이 주는 나무='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넉넉한 나눔 행보에 대해 유재욱 회장은 “사회에서 도와주신 만큼 당연히 사회에 환원해야 하는데 더 많이 나누지 못해서 그게 더 죄송스럽다”는 말부터 꺼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유 회장의 진심을 수십년 이어온 꾸준한 봉사활동이 뒷받침하고 있다.
“청년시절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당시 한 달 일하고 2만5000~3만원을 받을 때부터 꾸준히 기부를 해왔다”는 유 회장은 지난해 초록우산 명예의전당에 30년 이상 장기 후원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80년대부터 30여년 간 한 달도 빠지지 않고 기부한 공을 인정받은 것이다.(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따르면 30년 이상 장기 후원자는 전국에 94명, 대전·충남권에 6명이 있다.)
“살면서 제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30년 넘도록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기부해온 일”이라는 유 회장은 “나눔이란 참 좋은 것이고 따뜻한 것”이라는 말로 기부의 의미를 강조했다.
30여 년 꾸준한 기부 활동 못지 않게 유 회장은 후원 아동들을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도 남다른 정성을 기울였다. 시설아동과 1대 1 결연 후 크리스마스때는 아이를 집에 데리고 와서 하룻밤 데리고 자기도 했다. 자신의 아이에게는 짜장면을 먹여도 시설아동에게는 탕수육을 먹였다는 유 회장. 지금은 결연아동과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편지로 대신하고 있지만 성장 발육 사항 소식을 들으면서 꾸준히 관심을 갖고 보살피고 있다.
유 회장은 일종의 장학재단인 '오성 아카데미'를 결성, 시설 아동들의 학업을 지원하기도 했다. 어려운 형편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올곧게 자라 좋은 대학에 가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 몫을 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유 회장은 시설아동에게 학원비도 대주고 어린이날이면 케이크를 사들고 가서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유 회장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지난 2008년부터는 매년 1000만원씩 대덕구인재육성사업 성금을 후원해 오고 있다.
“어린 학생들을 키워주는 인재 육성이 제일 의미있는 일로 생각된다”는 유 회장은 “피란시절 못 먹고 못 배웠던 기억이 있기때문에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을 보면 이들의 교육문제에 마음이 쓰이고 이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했다.
▲영화 '국제시장' 보면서 눈물 흘리다… 어린시절 나의 이야기=유 회장은 서울에서 태어나 6·25 전쟁통에 부산으로 피란, 휴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징용에 끌려가시고 어머니가 부산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다. 숙주와 콩나물 장사를 하셨던 어머니.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어린 시절이 생각나 참으로 많이 울었다”는 유 회장은 “그 때 어머니가 울면서 혼내시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당시 여자아이들 사이에 머슴애는 유 회장 혼자였는데 유 회장 성격이 여리고 순하다보니 여자아이들에게 매일 얻어터지고 코피 터지고 울었다는 것. 그럴 때면 속이 상한 어머니는 “다른 애가 때리면 너도 때리고, 다른 애가 물으면 너도 물으라”고 울먹이시며 아들을 꾸중하셨다. “당시 아들이 다리 밑에서 얻어터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된다”는 유 회장은 “어려서부터 순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고 커서도 남을 해코지하거나 속이며 살지는 않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사업을 할 때도 1등을 하려고 욕심을 부리거나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는 유 회장은 “거짓으로 꾸미면 상대가 먼저 알아본다”고 말했다. “1등은 제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고 상대방에게 신의를 지킬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용'이지요.”
▲“철은 배반을 안한다” 동국제강 장상태 회장에게 철과 사업을 배우다=유 회장은 20대 청년 시절인 1970년대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동국제강의 고 장상태 회장에게 철에 대해 배웠고 사업에 임하는 자세를 배웠다.
고 장 회장은 당시 유 회장에게 “철은 절대 사람을 배반하지 않는데 사람이 돈을 벌어서 철을 배반하는 것”이라며 “철을 만지는 한 오로지 철만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특히 “철은 와인잔을 다루듯이 애정으로 바라봐야 한다”며 “답은 '철'에 있다”고 강조했다.
고 장 회장과의 추억을 떠올리던 유 회장은 처음 사업 시작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처음 사업의 시작은 '한신공구'라는 작은 철물점 가게를 내면서였다”는 유 회장은 “점포를 빌려서 진열대를 직접 만들고 망치와 펜치 같은 제품을 팔았는데 그만 화재가 나서 위기에 처했다”고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그래서 도둑 맞을 염려가 없고, 불이 나도 손해가 없을 사업을 생각하다 '철재상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부산의 동국제강을 찾아갔다는 것.
▲42년 철강사업 외길 걷다=“20대 젊은 패기만으로 무작정 당시 최고의 철강 회사라는 동국제강을 찾아간 것이 장 회장과의 인연으로 이어지게 됐다”는 유 회장은 1973년에 중부철재상사로 창업을 한 뒤 1983년에 법인으로 전환, 올해로 창업한지 42년이 됐다. 창업 1세대로는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셈이다.
긴 세월 오로지 철강사업 외길을 걸어온데 대해 유 회장은 “돈 벌었다고 무조건 밖으로 나가면 안된다시며 '모든 것은 현장에 있다'고 강조하신 장 회장님의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새겼다”고 말했다. 그래서 장 회장의 가르침대로 오롯이 철 사업만 한 세월, 번듯한 양복 한 벌 없이 작업복만으로 지냈고 각종 단체의 회장직 제안이 수없이 많이 들어왔지만 모두 다 고사했다. 오로지 사업에만 몰두하며 한길 한길 뚜벅뚜벅 철사랑 외길을 걸어온 유 회장은 한우물만 파서 성공한 대표적인 자수성가 CEO다.
▲해병대에서 사람 됐다… 해병대에 대한 무한애정=오늘의 반듯하고 바른 생활 사나이, 부드럽고 넉넉한 인품의 유 회장을 만든 또 하나의 귀한 인연은 바로 '해병대'다. 중앙대에 입학했지만 여러 이유로 자퇴하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는 유 회장은 “해병대에 가서 사람됐다”며 해맑게 웃었다.
“해병대의 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혼을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을 겁니다. 제가 해병대에 다녀온 덕분에 완전히 인생이 달라졌거든요. 개과천선했다고 해야할까요?(하하하)” 소탈하게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호인 유 회장의 해병대에 대한 무한 애정이 묻어나오는 말이다.
유 회장은 지금도 해병대 전우회원들과 정기적인 만남을 갖고 우정을 나누고 있다. 유 회장 집무실에는 해병대 동지들과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찍은 사진이 유달리 눈에 띈다.
▲메모의 황제… 20년전 수첩도 간직=유 회장의 집무실에는 20년 전부터 쓴 수첩이 빼곡이 쌓여있다. '메모의 황제'로 불리는 유 회장은 항상 수첩을 들고 다니며 모든 일정을 기록한다. 메모를 통해 어제를 기억하고, 오늘을 충실히 보낼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한테 주변 분들이 어떻게 해서 성공했는지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그 때마다 답은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현장에서 쌓은 내공이고, 둘째는 기다릴 줄 아는 지혜, 셋째는 귀를 열고 남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듣는 것이 비결입니다.”
▲호는 덕광(德光)… 많이 베풀고 살라는 뜻=친분이 있는 스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유 회장의 호는 '덕광'(德光)이다. 큰 덕자에 빛 광자를 써서 '많이 베풀고 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아낌없이 주는 큰 나무처럼 베풀고 봉사하며 살아온 세월, 유 회장의 집무실에는 10여년간 직접 모은 수석들이 즐비하다. 1만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수석, 자연을 그대로 갖다놓은 듯 자연스러운 수석이 좋다는 유 회장.
유 회장은 화기애애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를 중요시해 전 사원들이 함께 동강 래프팅을 다녀오고, 안면도에서 바다낚시 를 즐기는 등 직원간 단합을 위한 각종 행사에도 적극적이다. 퇴직 임원의 칠순을 챙긴 유 회장이 수백만원의 칠순잔치 비용을 지불한 일화는 인연을 중시하는 유 회장의 따뜻한 면모를 엿보게 한다.
“만물에는 적당한 무게가 있듯이 자신에게 맞는 무게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동국제강 장 회장님의 말씀을 새기며 살아왔다”는 유 회장의 집무실을 나서며 문득 학창시절 읽었던 '큰 바위 얼굴'이 떠올랐다.
대담=한성일 취재3부장(부국장) 정리=김의화 기자
-유재욱 오성철강 회장은?
1949년 7월7일생. 대전 신흥초등학교와 충남중학교, 대전상업고등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했다. 충남대 경영대학원, 한밭대 산업대학원 제2기 최고경영자과정, 충남대 제2기 평화안보대학원, 충남대 예술최고위과정을 수료했다.
1973년 창업한 중부철재상사를 전신으로 1983년 오성철강주식회사를 세웠고, 현재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다. 2005년 두성철강산업(주)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현재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다.
2006년부터 대전신용보증재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고, 2009년 대전MBC 사내이사로 취임했다.(現 이사), 2012년 대전상공회의소 제21대 부회장과 (재)대전경제통상진흥원 이사에 취임했다. 북대전세무서 세정협의회 부위원장과 대전사회복지공동모금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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