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수 총장은… 1928년 논산 출생. 공주고와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학에서 유학하면서 뉴욕 세인트 프랜시스 병원과 시카고 안과병원에서 수학했다. 이후 연세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3육군병원 안과과장을 거쳐 1962년 영등포 김안과라 불렸던 김희수 안과의원을 개설한 이후 현재 동양 최대의 안과전문병원으로 성장시켰다. 1979년부터 2001년까지 학교법인 건양학원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1980년과 1983년 건양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설립하며 육영사업에 뛰어들었다. 1991년 건양대학교를 설립하고, 1994년 건양대 의과대학을 유치, 2000년에는 건양대학교병원을 개원했다. 2001년부터는 대학의 총장으로 직접 건양대를 이끌면서 6년 연속 보건의료 국가시험에서 전국수석 배출, 교육역량강화사업,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ACE), 산학협력 선도대학 육성사업(LINC) 등 교육부 3대 사업인 대형국책사업에 모두 선정됐다. 또 지방대 특성화사업(CK-1)에 7개 사업단이 지원해 모두 선정되는 등 대학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어왔다. 1996년 충남도 개도 100주년 기념 '충남을 빛낸 100인'에 선정됐고, 2004년 대통령 표창(산학연 유공단체 |
●김희수 건양대 총장
안과의사로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던 삶에서 교육자로서 학생들의 인생에서 눈을 뜨게 해주는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덕을 베풀면 외롭지 않다'는 좌우명을 바탕으로 의사 시절 펼쳐왔던 나눔을 교육에 쏟아 붓고 있는 건양대학교 김희수 총장. 열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는 신념으로 일군 학교는 20여 년만에 어느덧 취업 명문 대학을 넘어 교육 명문 대학으로 지역 사회에 당당히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누구나 가고 싶은 대학, 누구나 동경하는 학교'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는 김희수 총장을 지난 12일 건양대학병원 총장실에서 만나 김 총장만의 교육철학과 앞으로의 건양대 비전을 들어왔다. <편집자 주>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의사였던 형님은 한밤중 문을 두드리는 마을 주민의 소리없는 다급함에 말없이 왕진 가방을 들쳐메는 적이 많았다.
어느날 아이를 낳고 먹을 게 없던 산모를 치료했던 형님은 옹색한 집안을 둘러본 후 그대로 문을 나섰다.
“먹을 것이 없던 집안에 무슨 진료비가 있겠어요? 의사라면 부자든 가난하든 병을 보고 치료를 해야지요. 우리때는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위급한 환자라도 '돈 가져 왔어요?' 하죠. 그게 다 교육이 잘못돼서 그래요.”
안과의사 시절 김희수 총장에게도 가장 중요한 가치는 돈이 아니었다.
“어느날 추석 무렵이었을 거예요. 젊은 남녀가 지팡이를 짚던 노인을 부축해 병원을 찾았는데, 실랑이가 벌어진 거에요. 검사를 해보니 수술만 하면 할아버지의 시력은 바로 찾을 수 있겠는데 할아버지는 한사코 집에 가겠다고 하는겁니다.”
알고보니, 젊은 남녀는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손자, 손녀였다.
앞을 못보는 할아버지를 위해 공장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개안 수술을 시켜드리기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할아버지는 손주들의 돈으로는 도저히 수술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계속된 실랑이를 지켜보던 김 총장은 그 가족을 불러 수술을 감행했다. 물론 무료였다.
의술이 아닌 인술을 펼치던 김 총장은 그 후에도 공단 여공들의 사시 수술과 무료 개안 수술을 해줬다.
전직 대통령의 안과 치료를 맡을 만큼 명의로 이름을 떨치던 김 총장이었지만 여공에서 전직 대통령까지 치료에 있어서만큼은 높고 낮음이 없었다.
이제는 김 총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나비 넥타이. 혹여나 의사의 긴 넥타이 끝이 환자들에게 닿아 불편함을 줄까봐 환자들 배려 차원에서 나비넥타이를 매게 됐다는 일화는 나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김 총장의 사려깊은 배려심과 인정 많은 성격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안과 명의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던 김 총장이 교육계에 뛰어들게 된 것은 일제시대와 6·25 전쟁 등 굵직한 현대사를 몸소 겪어 오면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무엇보다 가치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 1979년 폐교 위기에 처한 고향의 중학교를 부채와 함께 인수한 김 총장은 이듬해인 80년에는 건양중학교를 설립하고, 83년에는 건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김 총장은 중·고등학교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고향인 논산에 제대로 된 대학을 설립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실용적인 교육으로 지역과 기업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육성하고, 지역민들도 언제든 와서 전문 지식을 배울 수 있는 평생 교육기관, 이런 대학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드디어 1990년 11월 건양대학교 설립 인가를 받고 이듬해 정식으로 신입생을 받았다. 그리고 개교 20여 년만에 건양대는 명실상부한 취업 명문 대학으로 자리매김했다.
김 총장이 학교를 운영하면서 최우선으로 둔 가치도 바로 의사로서 철저히 지켰던 가치와 맞닿아 있다.
“똑똑한 인재를 키워내는 것도 좋지만 착하고 성실한 성품이 바탕에 깔려있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나도 쓸모없는 인재예요. 학생이 입학하면 끊임없이 인성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저의 소신이자 교육철학이죠.”
▲대학교육의 혁신 아이콘… 취업명문 대학으로 =각 대학마다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는 곳도 있고, 연구 성과에 중점을 두는 곳도 있지만 건양대가 가장 무게를 두는 것은 학생 교육이다. 학생 교육을 위해 김 총장이 평소 교수와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열정과 진정성이다.
“학생들을 내 손자, 내 자식 대하듯 하지 않으면 교육이라는 것은 절대 진심이 전달될 수 없어요. 그래서 교수들에게 내 아이들을 가르치듯 사랑으로 가르쳐달라고 당부하죠. 교직원들에게는 내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결해주듯 봉사해달라고 부탁하고, 식당에서 일하는 분께도 내 아이 밥 차려주는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해 달라고 말하죠.”
대학 설립 초기부터 '학생을 입학시켰으면 취업까지 책임진다'는 생각을 가졌던 김 총장은 지난 2004년 전국 대학 최초로 취업을 위한 전용 건물을 개관했다. 2011년에는 학생들의 취업과 산학 협력의 시너지 효과를 위해 기존 취업 관련 부서와 산학협력단을 통합하고 조직과 인력을 대폭 강화한 '산학취업본부'를 출범시켰다.
김 총장부터 솔선수범해 전국 방방곡곡의 기업체를 찾아다니면서 학생들의 일자리를 알아보고, 취업을 부탁하고 있고, 이런 노력은 교수들도 똑같이 하고 있다.
“취업 청탁이 대학 총장의 위신을 떨어뜨린다는 싫은 소리도 들었지만 우리 학생들을 위해 취업을 부탁하는게 교육자로서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에 대학의 역할은 학생을 가르쳐 졸업만 시키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취업을 시켜야 된다고 봅니다. 즉, 학생들의 미래까지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죠.”
건양대는 취업률 우수 대학뿐만 아니라 전국 대학 최초로 '취업을 위한 전문교육기관' 설립과 '동기유발학기', '창의융합대학'신설 등 다양하고 참신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지방대의 위기론이 심화되고 있지만 건양대는 '교육역량강화사업'이나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산학협력 선도대학 육성사업' 등 교육부의 주요 사업에 모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같은 건양대의 경쟁력에는 늘 '소통'을 우선시하는 김 총장의 리더십이 자리잡고 있다.
매주 목요일마다 김 총장을 비롯해 부총장, 단과대학 학장, 각 부처 처장, 행정팀장 등 대학의 보직자가 모두 참석하는 ACE건양 포럼의 경우 김 총장의 리더십이 어떤지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매주 다른 주제의 발표와 토론이 진행되는 이 포럼을 통해 김 총장 한 사람의 결정이 아니라 구성원의 의사를 수렴해 대학의 전략과 방향을 정한다.
▲고등학생이면 누구나 오고 싶은 대학 만드는 것이 꿈=대학 설립 초기부터 지역사회와 끊임없이 스킨십을 해온 건양대는 지난 2004년 의대와 간호대 정원의 일부를 지역 출신 학생으로만 채우는 '지역인재 전형'을 실시했다.
정부가 2015년에야 지역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방대 모집정원의 일정 비율을 해당 지역 고교 졸업자로 선발하는 '지역인재 전형'을 실시한 것을 생각하면 김 총장은 10년이나 앞서 지역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셈이다.
학교를 설립하고 10년이 지난 2001년 직접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가르쳤으면 책임진다'는 자세로 대학을 운영해온 김 총장은 요즘같이 취업이 어렵고 88만원 세대란 말이 유행하는 시기에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도 지금도 현장에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젊은 세대가 희망을 갖고 열정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가는 사회가 되길 희망하는 거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김 총장은 “지금까지 건양대가 취업명문으로 알려졌다면 앞으로는 교육명문 대학으로 발전시키고 싶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건양대는 논산 캠퍼스와 대전 캠퍼스를 창의융합 캠퍼스와 대전 메디컬 캠퍼스로 각각 특성화시켰다.
논산 캠퍼스는 창의융합대학을 필두로 혁신적인 교육체제를 마련하고 융합적 인재를 규모있게 양성해 나가고, 대전 메디컬 캠퍼스는 건양대병원과 연계한 보건 의료계열의 특성화와 중부권 보건 의료 클러스터의 중심지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김 총장은 보다 체계적인 교육 지원과 보건 의료 특성화를 위해 대전 캠퍼스에 대학 본부와 도서관 건물을 건설하기도 했다.
새벽 4시만 되면 병원 인근 자택 아파트에서 나와 맨 위층에서부터 병원을 돌면서 환자들을 회진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김 총장은 본보와 인터뷰를 하던 날 오전 11시 만보기가 이미 7000번을 가리킬 정도로 병원과 캠퍼스를 활발하게 누비고 있다.
구석구석을 잘 비추라는 명곡(明谷)이라는 자신의 호처럼 세상을 밝히고 학생들의 인생을 밝히면서 베풂을 실천해 온 김희수 총장.
“앞으로 고등학생들이 건양대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건양대를 존경받는 좋은 대학으로 만들고 싶다”는 김 총장에게서 진정한 교육자이자 세상을 밝히는 성인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대담=한성일 취재4부장(부국장)ㆍ정리=오희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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