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선 편집부장 |
열일곱, 열여덟… 서른, 마흔, 그리고 쉰을 향해.
끝이 없을 것만 같던 미성숙의 사막과, 불덩이가 끓던 청춘의 화산을 건너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리라는 불혹(惑)이라는 정류장을 지나치니 한층 더 깊어지고 넓어진 인생의 바다가 펼쳐집니다.
나무는 한 살 더 먹을때마다 나이테를 하나씩 더 갖게 되지요. 굵어지는 줄기 아래에서 얼마나 치열한 세포분열을 겪고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봄과 여름은 연하게, 가을 겨울은 진하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무엇으로 나잇값을 하고 있을까요. 흔히 말하는 연륜(年輪)이라는 것이 생일케이크 위에서 늘어가는 촛불의 수 만은 아닐텐데 말입니다.
40, 50년을 살았지만 철없는 아이처럼 한숨이 나오는 주변인들을 떠올려 봅니다.
내가 네 나이땐… 너희를 어떻게 키워줬는데… 내 자리에 올라와 봐라…. 뭐 이런 말들은 애교수준입니다.
속이 좁은데다, 이기적이고 편협된 잣대를 품고서야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리가 만무하죠. 그래서 순간순간 턱밑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삼킵니다. “나잇값좀 하세요!”
나이를 먹는것이 두려운 이유는 늙고 쇠함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혹시라도 그 누구처럼, 가장 싫은 사람의 닮은꼴로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남모를 걱정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값을 치러야 하고, 값 중에 젤 어려운 게 나잇값이기 때문입니다.
탐스럽게 차오른 달이 한가위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해줍니다.
어릴적 만두처럼 크고 투박한 송편을 빚을때면 당신은 웃음 반 걱정 반 버무린 눈빛으로 말씀하셨죠. “이담에 딸을 낳으면 딴건 몰라도 키는 크고 튼튼하겠구나…” 라고요.
노년의 조언은 예지력도 담겨있나 봅니다. 나무라실때도 잔소리라 느껴질 때도 틀린 말씀은 한군데도 없었으니까요.
시간이 조금 지나 제법 볼만한 송편을 빚을 나이가 되었을 때 당신의 엷어진 미소를 기억합니다. “속이 꽉 차게 빚는걸 보니 아이를 낳으면 머리가 꽉 차서 명석하겠다.”
참 좋았던 나날들 이었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추억은 짧고, 시간이란 놈은 손가락 사이로 술술 달아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당신과 나의 시간은 거꾸로 흘렀나 봅니다.
고장난 LP플레이어처럼 되풀이 되던 대화. 내가 네 나이땐… 너희를 이렇게 키웠는데… 내 나이가 돼봐라….
반짝이는 눈빛도, 총명하던 언어들도 흘러가는 세월엔 장사가 없는 법인가요. 꽤 많은 나이를 먹게 되면 철 없는 아이로 유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 또한 예외는 아니라는 것도요.
할머니, 우리 할머니.
한평생 바닷가 옆 남루한 마을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밥을 짓고, 물질을 하고, 밭일을 하다가 둥그스레 굽은 등과 작아진 어깨를 지닌 채 세상을 떠나셨던 외할머니.
정성스레 포장된 사과상자며 명절 준비를 위한 선물세트를 양팔 무겁게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예년보다 훨씬 더 크다는 '슈퍼문'이 비춥니다. 그 달엔 절구를 찍고 있는 토끼도, 슬피 울고 있는 늑대인간도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더 사랑하며 살라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지혜롭게 풀어나가라고, 그것이 잘 사는 인생이라고 당부하셨던 당신의 오래된 가르침이 가슴을 스쳐 지나갑니다.
나이라는 것을 한 그릇 더 먹고, 소홀했던 부모님 생각에 더없이 부끄러운 가을밤입니다.
명절이 오기 전 보고싶다고, 사랑한다고 전화를 해야겠어요.
어쩌면 할머니, 나잇값이란 이런 것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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