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 교열팀장 |
데스크 칼럼을 뭘 쓸까 고민하다 청양 강정리 ‘불법 폐기물 매립’에 대해 쓰기로 마음 먹었었다. 강정리는 석면광산 위에 폐기물처리장이 들어서면서 논란이 되고 있는 마을이다. 환경은 물론이고 주민들 건강까지 위협하고 있어 지역의 ‘뜨거운 감자’다. 이렇게 되기까지 정부와 충남도·청양군 등 지방자치단체의 감독 소홀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난 쓰지 않기로 했다. 불의를 보고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내 가족이 해당 군의 공무원으로 있다는 이유에서다. 만에 하나 나의 글로 인해 내 가족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소심함에 쓰기를 포기했다. 자기검열이 따로 없다. 여태까지 부르짖었던 투철한 응달의 정신은 허위였나.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쓰는 지식인의 책무는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 때문에 크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공익(公益)을 추구한다는 언론의 경우 그 책무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언론은 비판이 생명인데 자본에 예속돼 기득권층의 이해를 대변해왔다. 또한 철저한 권력유지의 발판이 되거나 권력자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데에 두려워한다. 언론은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국민들에겐 자기합리화 내지는 변명으로 비춰진다.
2014년 8월 17일은 기자협회 창립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번 기자협회보 1면 제목은 “다시 역사의 길을 걷겠습니다”다. 1964년 8월 17일 한국기자협회창립대회의 빛바랜 흑백사진이 커다랗게 실린 1면 머리기사는 뼈아픈 반성문이었다. ‘할 말을 하고 쓸 것을 쓰고 있는가’ 자문하면서 “반드시 말해야 할 것을 말하고 반드시 쓸 것을 반드시 써야 한다. 그것뿐이다”라며 결연한 의지를 천명했다.
사실 한국언론의 역사는 긍지와 오욕으로 점철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의에 맞서 투쟁하다 해직되는가 하면 수구세력의 앞잡이가 되어 ‘영광의 나날’을 보내는 기자도 존재한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체제 아래 양심있는 기자들은 언론자유를 지키려고 혼신의 몸부림을 쳤다. 그런가 하면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의 1등 공신이었던 기자도 있었다. 5월의 민주시민들이 학살당하던 광주 현장을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이는 무법천지”로 매도한 그는 출세가도를 달려 언론권력의 1인자로 군림하고 있다.
그런 만큼 국민들의 언론에 대한 불신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오죽하면 세월호 참사 이후 기자들이 ‘기레기’란 말을 들으며 냉소와 조롱의 대상이 됐겠는가. 기자협회보에서 우장균 YTN 해직기자는 후배기자들에게 불의에 맞닥뜨렸을 때 “기자를 하려했던 초심을 떠올리며 인간으로서, 기자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생각하라”고 당부했다. 하버마스 역시 언론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매스미디어는 사법부와 유사하게 정치적 행위자와 사회적 행위자로부터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고. 우리나라 사법부가 독립적인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권위주의 권력일수록 억압적으로 언론을 통제한다. 그래서 언론자유를 지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기자는 특별한 신념과 사명감이 필요한 직업이다. ‘스노든 폭로 주역’ 글렌 그린월드는 “협박 받을수록 더 충격적인 정보를 공개할 것”이라고 권력에 당당히 맞섰다. 기자의 정체성은 글로써 증명해야 한다는 걸 그린월드는 보여줬다. 기자협회 또한 언론은 권력을 비판.감시하고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라는 기자정신을 스스로 주문하고 있다. 기자는 리포터가 아닌 저널리스트여야 하는 이유다.
밤은 숨 쉬는 모든 것에 베푼다. 혹여 어쭙잖은 이 반성문이 나 자신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건 아닌지 염려된다. 변할 수 없는 사실은, 적어도 난 비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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