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출마니 하마니 낙마니 하는 말을 많이 쓴다. 요즘 같으면 인사하는 각도를 보면 대강 감이 잡힌다. 속으로 '오호, 이 사람 선거 나오겠군' 하면 곧이어 그가 '말을 몰고 나선다'는 신문기사가 난다. '출마' 소식인 것이다.
인사이동에 관한 소문이나 평판을 하마평이라 한다. 말이 관용차이던 시절,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下馬碑) 앞에서 따분한 마부들이 곁들인 주인의 벼슬길이며 인물평이 하마평이었다. 하마평에 오르지 않다가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경우가 문창극 주필이다.(편하게 '주필'로 부른다.) 충청 출신인 데다 논설위원실을 오래 지킨 그가 윤창중 논설위원(전 청와대 대변인)의 오점까지 지워주길 바랐던 것도 사실이었다.
굉장히 솔직히 털어놓는다. 누가 해도 할 것, 문 주필이 잘 '달리기를' 바랐다. 또 고백하자면 그의 칼럼을 몇 년간 집 아이들에게 읽혔다. 사물 공부엔 물리, 상업을 하려면 상리, 법학을 하려면 법리를 가다듬듯 문리(文理)를 틔우라는 명분에서였다. 진보지 칼럼도 동일한 비중으로 읽게 했다는 것, 그리고 이번 토크가 제도의 일단을 지적한 것임을 굳이 밝혀둬야겠다. 보수냐 진보냐에 절대의 비교우위는 없다. 이념이란 이론화한 신념이다. 생뚱맞은 비유지만 달리는 말(馬)에 보수와 진보 없듯이 말이다.
그런데 잘 달릴까 했던 문 주필이 '역사인식' 문제로 초반부터 크게 휘청거렸다. 그러자 연암 박지원의 충고가 떠올랐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묶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隊伍) 행진과 같다.… 조응은 봉화이고, 비유는 유격의 기병이다. 억양반복이란 끝까지 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려 다시 묶는 것은 성벽을 기어올라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200여 년 전의 연암은 내 기자생활 초반의 길잡이였다. 언어의 세계는 어려웠다. 청문회의 세계는 더 어렵다.
'청문(聽聞)'은 '듣는 것'이 주가 되는 행위다. 검증은 하면서 말할 기회는 충분히 줘야 한다. “제발 저 좀 이해해 주십시오.” 장수가 입으로 천 마디 궁상 다 떨고 출사표를 던진다면 무슨 기백이 남겠는가. 팩트(사실)와 진실이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왼쪽 가슴에 태극기 달고 애국자연하는 눈속임도 있다. 누락으로 짠 왜곡이 있고 팩트만 갖고 거짓을 엮는다. 청문회는 앞선 제도지만 주마(走馬)도 하기 전에 말이 앞발 쳐들고 히힝거리게 하는 현행 방식은 손봐야 한다. 기마(騎馬) 자세도 취하기 전에 혼자 뭇매 맞고 곤두박질치는 정치행정문화의 잔인한 풍경은 보기 딱하다.
어찌어찌 낙마(馬)의 사선을 뚫고 살아난다고 치자. 모양 다 빠진 '바보총리'가 되어 무슨 개혁정국을 돌파하겠는가. 힘차게 달릴 수나 있겠는가. 말에 오른 꿈은 길몽이고, 말 타고 달리는 꿈은 길흉이 반반인 해몽을 이제야 알 만하다. 진실과 허구 사이의 말 잔등에서 '과거'를 침묵시켜야 하는 도덕성의 산봉우리는 역시 험하고 모질다. 말에서 굴러 떨어지기 전에 불가피하게 말을 돌려세우는 걸 늑마(馬)라 했다. '문창극 결단' 이후는 늑마의 행마, 낙마의 행마가 이어지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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