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15일), 고려대병원에서 누나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 근처 미용실에 들렀다. 그렇다고 남자 연예인들이 단골인 청담동 미용실이나, 생애 최고의 커트를 했다 해서 로망 판타지를 연상했다간 금방 실망한다. 오늘의 현장은 미용사의 시어머니인가 싶은 연배의 할머니가 일직선으로 가로누워 있던 병원 근처의 허름한 미용실이 전부다. 처음엔 전도 나온 목사로 착각한 할머니도 흠칫 놀랐었다.
“아이고! 손님, 아깐 놀라셨죠? 할망구가 누워 있어서.”
머리통은 맡기고 눈동자만 굴려 거울을 본다. 거울조차 세월의 손때를 강렬하게 내뿜는 듯했다. 라캉의 '거울단계적 공간'에서 머리가 만져지는 촉각을 느끼고 자신의 사회적 자아가 잘 연출되는지를 거울로 감시한다던가. 사실 그런 개똥 심리학보다 미용사의 사명이라는 '시대 풍조를 건전하게 지도(문화적 측면)'가 좀 웃음이 나면서도 더 마음에 든다.
그 미용사는 아무튼 22살 처녀 적에 미용기술을 배워 27살부터 44년간 한자리를 지키면서 그 건물도 사들였다 했다. (미용실 10년 생존율은 29.6%, 평균 존속기간은 3.0년이다.) 모든 것이 오래 묵은 익숙함과 막 생긴 낯섦의 충돌 그것이었다. 짧은 시간 쏟아낸 이야기만으로 한국판 <사랑한다면 그들처럼> 한 편은 찍음직했다. 압축파일 같은 진기한 이야기들은 아껴두고 에피소드 하나만 소개한다. 찍은 사진도 미공개다.
머리 자르기, 다듬기가 끝나고 세면기 쪽으로 걸음을 떼던 참이었다.
“원래 머리 안 감지요, 우리 집은.”
미용실의 요체는 머리 감기인데, 머리 깎기는 머리를 감기 위한 예비행위에 불과한데….
“머리는 우리 영감도 안 감겨줘. 흐흐. 대신 커트비 4000원만 받아요. 이리 와봐요. 서비스로 특별히 감겨줄 테니.”
난감한 표정을 지어서였는지, 습관대로 '선생님'이라 불러줘 감격했는지 허리가 약간 구붓해진 미용사는 낡은 온수 밸브를 켰다. 잠깐 소견을 밝히면, 미용은 표현과 소재의 선택이 제한된 부용예술(附庸藝術)이라지만 회화나 조각 등 자유예술에 뒤지지 않는다. 미용사는 미용학을 전공한 예술가다. 게다가 할머니 미용사는 수수하지만 기술적 지성, 그런 게 있었다.
“교수 양반이신가? 공무원 나리신가? 여기 올 일 있으면 또 들러요.”
“그럴게요. 동묘앞역에서 6호선 환승하면 요 앞 안암역까지 얼마 안 걸려요.”
어둠침침한 미용실을 빠져나오는데 미용사 아내가 죽고 나서 '늙은 소년' 앙트완이 추는 허망한 배꼽춤이 어른거렸다. 남자는 영원한 소년인가. 연모하던 동네 미용사 셰퍼 부인이나 미용사 아내 마틸드를 향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할머니 미용사를 엄마 외에, 아내 외에 머리를 감겨준 합법적인 '여자들' 반열에 올렸다. 미용사 판타지? 아무래도 좋다. 노라 에프린의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나 한번 읽으려 한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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