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난순 교열부장 |
해마다 이맘때면 서둘러 낡은 배낭 둘러메고 새벽 첫차에 오른다. 2월의 물빛이 가장 아름다운 통영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국적인 남국의 도시 통영 앞바다의 검푸른 물결은 봄의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단단하고 반들반들한 진초록의 동백나무 이파리속의 동백꽃은 물오른 처녀의 붉은 입술 같다. 다시 봄이, 지상의 모든 것들을 사랑할 여력이 내게 남아 있음을 절감한다. 지루하고 긴 겨울을 견뎌낸 나를 위한 아름다운 헌사가 따로 없다.
그러나 이 봄이 마냥 설레고 기쁘지만은 않다. 3월 11일이면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3주년이 된다. 지난 주에도 후쿠시마 핵발전소 탱크서 고농도 오염수가 대량으로 유출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핵 사고는 직접적인 피폭 위험뿐만 아니라 비, 토양, 바다, 먹을거리도 안심할 수 없다. 핵이 주는 가공할 공포를 구체적으로 실감한 건 지난해 가을 엠마뉘엘 르파주의 『체르노빌의 봄』을 읽고서였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핵발전소 대폭발'. 엠마뉘엘 르파주가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 직접 다녀와 그린 『체르노빌의 봄』은 핵의 처참함을 몽환적으로, 무섭게 전해준다. “남편을 포옹하는 것은 금지였다. 만질 수도 없었다”,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남편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전염성 높은 방사성 물질이에요”라는 문장은 가슴을 저미게 한다. 핵발전소가 터졌을때 주민들은 곧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삶은 통째로 뜯겨나갔고 여전히 체르노빌은 통제구역이다.
지금도 지구촌의 핵발전소는 매일 가동되고 매 순간 방사능 폐기물이 발생한다. 당연히 폐기물 처분장이 필요하다. 태안 안면도는 1990년 핵폐기물 영구처분장 후보지로 거론돼 주민들의 반대 시위가 격하게 벌어졌었다. 당시 심대평 도지사는 “주민들이 반대하면 보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가 '백지화'가 아닌 '보류'라는 말에 주민들의 분노를 더욱 샀다. 결국 주민들의 끈질긴 투쟁은 안면도 후보지 제외 발표를 이끌어냈다.
인류가 낳은 재앙의 기술, 핵은 2차 세계대전의 끝을 장식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은 인류가 기술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괴물을 꺼냈는지 세상에 알렸다. 아인슈타인은 핵무기 개발에 관여한 이론물리학자다.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를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아인슈타인은 반핵운동을 펼쳤다. 그로 인해 공산당 앞잡이라고 지탄받았으며 FBI에서 체포하려 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일본은 원폭·원전폭발 등 두 번이나 핵 참사를 경험한 나라다. 지난 9일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탈원전 반란'으로 화제를 모았던 고이즈미와 호소카와 전 총리가 실패했다. 나라가 망할 수도 있었던 3·11 참사를 경험하고도 원전질주를 멈추지 않는 아베정권에 제동을 걸기 위해 선거 운동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원전에 대한 문제제기를 좌파의 궤변 쯤으로 치부하는 현실은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원전 비중을 2035년까지 29%로 늘리겠다는 현 정부의 에너지정책에 야당들은 별 문제를 삼지 않는다. 탈원전을 표방하고 이를 정치의 핵심이슈로 만드는 것이 득표에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자연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그처럼 즐겁게 재잘거리며 날던 새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어쩌다가 발견되는 몇 마리 새들도 몹시 떨면서 날지도 못하고 푸드덕거리다가 죽고 마는 것이었다. 봄은 왔는데 침묵만이 감돌았다.”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에서 무분별한 살충제의 사용으로 생물이 죽어가는 상황을 고발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농약사용 규제를 결의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는 우리의 의식을 바꾸어 놓았는가? 봄이 오지 않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가 우리에게 묻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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