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난순 교열부장 |
말[馬]! 신이 빚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이 말이라고 한다. 군살하나 없는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미끈한 몸통에, 길쭉한 다리와 달릴 때면 바람에 날리는 부드러운 갈기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조차 초라하게 만든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프랑스 대표팀 축구선수였던 지네딘 지단은 건장한 골격의 남성적 매력을 풍기는 남자다. 당시 어느 패션디자이너는 그를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 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침대로 뛰어드는 종마형'”이라고 평했다.
사람마다 어떤 대상이 머릿속에 각인되는 경우는 다양하다. 상황에 따라 혹은 그사람의 감성, 심리적인 요인 등의 요소에 의해 달라진다. 내게 있어 말의 이미지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장면이 내 심상에 자리잡고 있다. 대학 3학년 가을쯤 영화 '양철북'을 봤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양철북'은 나치이데올로기에 현혹된 소시민계층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표현방식이겠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로테스크하면서 외설적이고 기괴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바닷가에서 뱀장어를 잡는 광경이다. 터너의 낭만적 그림을 연상케 하는 바닷가 풍경 속에서 뱀장어 낚시꾼이 건져낸 것은 죽은 말대가리였다. 그리고 그것을 파먹은 살찐 뱀장어들이 말의 귀와 코와 입에서 기어나오는 끔찍한 장면은, 너무도 초현실적인 악몽을 꾸는 듯한 공포감을 주었다.
여하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은 인간의 역사에서 특별한 존재로 등장한다.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농경지대를 약탈·정복해 기마생활 특유의 문화를 일으킨 기마민족의 생존수단은 말이었다. 스키타이, 흉노, 돌궐, 거란, 부여, 고구려 등이 기마민족의 뿌리다. 일본 사학자 에가미 나미오는 '기마민족정복국가설'에서 북방 유목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상륙해 야마토정권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에가미는 일본정복을 가능케 했던 것은 기마민족의 기마전술이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칭기스칸은 말을 이용해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인물이다. '피의 정복자' 혹은 '동서문화 교류의 아버지' 칭기스칸의 말발굽은 다른 어떤 정복자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다. 기마민족 몽골제국은 시베리아부터 인도까지, 베트남부터 헝가리까지, 고려에서부터 발칸제국까지 뻗어 있었다. 전쟁을 일으켜 광대한 몽골제국을 세웠지만 결과적으로 유례없는 동서간 문화교류가 이뤄졌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면서 상대국을 굴복시켰지만 몽골제국은 주위의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융합해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런 의미에서 '철의 실크로드'는 완성돼야 한다. 한국철도는 해방 후 남북간 철도 운행이 중단됐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기관사의 절규는 완고한 분단 앞에서 녹슬어 가고 있다. 부산에서 시작해 러시아, 서유럽까지 동서양의 인적·물적 교류가 확대되는 그날을 그려본다. 대전에서 경의선을 타고, 말을 타고 드넓은 초원과 설원을 달렸던 옛 유목민족의 발자취를 따라 달리는 꿈을 꾼다. 그리고 시베리아의 침엽수림과 바이칼 호수, 도스토옙스키의 유형지 옴스크를 만나고 싶다.
2014년 올해는 말의 해다. 불을 뿜으며 구름 위로 비상하는 천마의 힘찬 모습이 그려진 '천마도'는 우리 조상의 강한 기상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최근 요동치는 동북아의 긴장 고조를 보노라면 힘센 나라들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선택할 입지가 복잡함을 보여준다. 북한의 과도한 군사적 도발과 일본의 군국주의 회귀, 미·중의 힘겨루기는 한반도에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다. 국제정치의 현실은 냉정하다. 중요한 건 한반도 문제의 주인은 우리라는 것이다. 진취적이고 활달한 말의 기상으로 만주 벌판을 달렸던 고구려인의 자유의지를 상상해 보자.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국가 이익을, 나를 지켜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내가 말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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