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의화 문화독자부 부장 |
우리나라도 양반들의 장례식에 슬픈 분위기를 띄우는 '곡비'가 있었다. 곡을 하는 여성노예인데, 주로 어린 여자아이를 앞세웠다. 로마시대 무대에 선 배우들은 가면을 썼기 때문에 언어적 표현은 무대 앞에 있는 '코러스'들이 관중들에게 배우들의 몸짓을 말로 전달해줬다. 무성영화시절 화면 속 배우들의 대사를 '변사(辯士)'가 대신해줬듯이 말이다.
곡비나 변사는 한마디로 '대신하는 사람'들이다.
지난해에 이어 새해에도 이어질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안녕들하십니까?'가 아닌가 싶다. 취업이 힘들뿐더러 매일매일 아르바이트 중인 고려대 학생이 담벼락에 붙인 한 장의 대자보가 '안녕 신드롬'을 낳으며 사회 구석구석을 파고들고 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이 쏟아졌다. 노동현장을 비롯해 교육, 경제, 정치, 사회분야 등 전 분야에 걸쳐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봇물을 이룬다.
들불을 지핀 '청년' 고려대생을 비롯한 20대들의 처지를 한번 살펴보자. 정확히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국가부도사태를 전후해 태어난 'IMF 키드'였다. 구조조정과 대량해고로 직장에서 쫓겨난 아버지, 사업하다 부도난 아버지, 식당이나 노래방이라도 나가서 학비라도 벌려는 어머니의 한숨과 고달픔을 먹고 '빈 집'을 지키며 자란세대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하고 일찍 어른이 되기를 강요받았던 시대를 살았다. 산타 할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 모든 어린이에게 나줘 줄 선물을 담을만한 큰 자루는 없다는 것을 겨우 깨우친 뒤, 질풍노도와 같은 청소년기인 지난 2008년에는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로 또 한번 싸늘한 현실 속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청춘이 아파서 괴로운 인간들이다. 이들은 그 시절에 태어난 죄밖에 없다.
소소한 욕망과 꿈꾸기를 억압당한 성장기에는 불만스러운 현실의 원인을 묻거나 따지는 것은 사치였을 뿐 더러 침묵이야말로 가장 현실도피적이고 지혜로운 선택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들의 억눌린 슬픔과 아픔을 대신하는 곡비이자 그들의 응어리진 이야기를 전하는 변사의 한 명이 고려대생이었을 뿐이다. 자신을 둘러싼 프레임과 패러다임이 잘못됐다는 것을 묻고 따지기 시작했고 결국은 나이기도 한, “당신은 어떠냐”고 말 걸기에 나선 것이다.
맥루한의 “누가 물을 발견했는지는 모르지만 물고기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라는 말처럼 물속에서 살아가기 바쁜 '물고기'에 불과했던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유영하는 물을 새로운 각도에서 의문을 갖고 바라보려고 한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효율만능과 패가름·차별, 양극화 등 신자유주의의 짙은 그늘로 만들어진 물 속의 모든 물고기들에게 현실 자각을 권유하고 유대와 연대를 제안한다.
철도가 멈추면 버스타면 되고 버스가 멈추면 택시타고 택시가 멈추면 버스나 철도타고 의료민영화되면 돈을 더 벌면 되고 비정규직 싫으면 정규직 되면 되고 내가 쓰는 전기는 밀양 송전탑에서 끌어오는 것이 아니고….
'그 세상이 내가 사는 곳이기 때문에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는 공감을 바탕으로 안녕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시작을, 서로에게 말을 거는 것부터 하자는 것이다.
청나라 사상가인 공자진은 “세상에 생기가 넘치는 것은 비바람과 번개가 자극을 주기 때문인데 만 마리 말이 똑같이 벙어리가 되었으니( ) 참으로 슬프다” 고 했다.
사회와 나라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상황은 침묵이다. 곡비와 변사라도 있어서 세상이 숨막히지 않게 된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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