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명식 쌍마트랜스 대표 |
●[기업&CEO]신명식 쌍마트랜스 대표를 만나다
'(후이이이힝 후이이이이힝! 더그덕~ 더그덕~) 쌍마~!! 이삿짐을 나른다!~ 쌍마 트랜스!~~ 867-2404 867-2404 이삿짐의 모든 것, 포장에서 정리까지 이제 대전쌍마트랜스에 맡겨 주십시오!!! 국내는 물론(뿌우우웅) 해외까지(두두두둥) 쌍~마 !! 트랜스 !~!~!'
CF계의 전설 쌍마트랜스의 CF 송이다.
대전 업체임에도 인상적인 CF 송 덕분에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면서 대한민국 이사 업계의 최강자로 우뚝 선 쌍마트랜스 뒤에는 누구보다 시대를 읽는 안목이 뛰어나고 열정으로 똘똘 뭉친 신명식 주식회사 쌍마 대표(59·한국이사화물협의회 회장·사진)가 있었다. 무에서 시작해 유를 창조한 대표적인 자수성가 인물인 신명식 대표를 만나 성공 비결을 듣기 위해 지난주 유성구 계산동 빈계산 자락에 자리잡은 주식회사 쌍마를 찾았다. 수천평 대지 위에 오렌지색 쌍마트랜스 마크가 선명한 차량들이 즐비한 곳주식회사 쌍마의 사무실에서 신명식 대표와의 인터뷰가 이뤄졌다. 포장에서 사후 정리까지 국내 이삿짐의 판도를 바꿔놓은 신명식 대표로부터 블루오션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기까지의 열정적인 인생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
▲쌍마라는 이름의 탄생 경위와 CF이야기=1992년 신명식 대표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주)신명으로 회사를 설립했다가 1995년 쌍마로 이름을 바꿨다. 신 대표는 자신의 기업이 공장 이전과 기업 이전, 포장 이사를 비롯해 물료를 보관하고 인테리어 리모델링을 하는 물류기업체니까 회사를 상징하는 동물 캐릭터로 물건과 사람을 나르는 운송수단인 말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말은 강하면서도 유연하고 사람에게 이로운 동물이니만큼 이삿짐센터 활용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쌍마의 영문 이니셜과 신명식 대표의 이름 이니셜이 같은 SM이라는 점도 쌍마라는 이름으로 회사명을 바꾸는데 주효했다. 정남 프로덕션의 CF제작팀에 의해 제작된 쌍마 CF송으로 95년부터 공중파와 비디오, 오디오를 겸해 광고했는데 소위 말해 '튀는 광고' 덕분에 쌍마 전화번호 '867-2404'가 쌍마트랜스 상호로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되는 주요 동기 부여 수단이 됐다.
▲ 한국전력연구원 이삿짐 반입. |
신 대표는 “물반, 고기반인 저수지에서 고기가 잘 잡히는 법”이라며 “새 아파트 입주민들에게 판촉물을 주는 것은 미끼를 던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사도 계절사업이기때문에 한겨울에는 수요가 적어도 계속 광고 노출을 시켜 사람들의 기억속에 각인시키는 것이 바로 저수지 마케팅”이라고 소개했다.
남들보다 발빠르게 부지런히 사전 정보를 입수해 대처하는 법을 터득한 신 대표만의 성공 비결은 바로 그가 개발한 '저수지 마케팅'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5년부터 2013년까지 18년동안 한달 평균 100여건, 1년에 1000건, 10년에 1만건, 20년에 2만건 이상의 전국 이사를 책임져온 신 대표는 서비스 교육과 성실성의 귀재이기도 하다. 대전에서 150여개, 전국에서 2000여개의 이삿짐센터가 경쟁하지만 신 대표 스스로 지금도 쉬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이삿집에 가서 쓸고 닦고,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여전히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대전에서 최초로 전문 포장이사 일을 시작했던 신명식 대표는 이 업계에서 '이삿짐센터의 로망'으로 불리고 있다. 한번도 곁눈질하지 않고 오로지 일로만 승부를 걸면서 성실하게, 짜임새 있게, 규모있게, 건강하게 일하고 있는 신 대표에게는 육순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은 청년과 같은 열정과 패기가 넘쳐 흐른다.
▲ 안전한 이삿짐 이동을 위한 무진동차량. |
신 대표는 “이삿짐업계에서 잔뼈가 굵다보니 너무나 절실히 바라는 점이 있다”며 “이삿짐은 아직까지도 일일이 사람의 손발에 의존해야 되는데 일일이 수작업을 하는 3D업종이다보니 이 일을 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지원자가 적어 대형업체의 이사 건이 있을때마다 인력을 구하기 어려워 비상사태를 빚는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대학에서 이삿짐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과가 생겼으면 좋겠다”며 “고가 사다리 이용외에 포장에서 정리, 운반까지 모두 자동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게 이삿짐업계의 과제”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배워라=바로 '언더잡 트레이닝'을 이르는 말이다. 30여년 전만 해도 이사라면 가족들이 바리바리 보따리와 신문지에 싸서 이삿짐센터 트럭 2424를 부르는게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이 시기에 일본에서 포장이사 개념이 도입됐다. 화장품 업계에서 사무직일만 했던 신 대표는 미래의 블루오션 시장을 내다보고 생소한 분야에 뛰어든 만큼 직접 현장에 가서 부딪히고 연구하며 이삿짐 싸는 일을 익혔다.
신 대표는 “대전에서 25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포장이사는 앞으로도 영원히 생활의 필수부분이기때문에 수요가 무궁무진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포장이사 업무 자체가 힘들기는 하지만 어음이 없는 현금장사이기 때문에 메리트가 있어 누구든지 창업을 한다면 성공 가능성도 높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신 대표는 쌍마에서 열심히 일한 직원들에게 인센티브 차원에서 각 구별로 이삿짐센터를 분양해줄 계획이다. 그는 '공수레공수거'라는 말처럼 재산을 아무리 많이 축적한다해도 결국은 다 가지고 갈 것이 아닌 만큼 사회에 환원하고 싶은 바람을 전했다.
▲ 쌍마트랜스 직원들. |
쌍마는 1992년 설립 이후 아웃소싱과 공장이전, 기업이전, 물류보관, 포장이사 전문기업으로 성장해 오면서 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노하우를 자랑하고 있다. 지방 익스프레스 업체로서는 대전, 충청 최대 규모다.
아웃소싱분야는 제조, 가공, 포장, 물류, 건물관리(경비용역, 청소용역)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다. 특히 (주)태평양 대전공장(조립, 포장), 애경유지 대전공장(선물세트 조립포장), 진로종합식품(식품가공 포장) 화학과 농약제품(가공포장) 업체인 동양화학, 영일화학, 미성농약 등의 업무경험과 식품 및 빙과류(수창물산) 선별포장작업과 고속도로 상행선 입장 휴게소 시설관리, (주)고제 경비용역 등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사물류사업부는 창사 이래 현재까지 가정이사와 더불어 사무실, 연구소, 학교, 관공서, 기업, 공장 등의 기관(단체) 이사 실적을 갖고 있다.
특히 익스프레스 사업부는 가정집 이사를 비롯해 관공서와 대형 사무실 이전과 같은 대규모의 이전 능력을 갖추고 있다. 1998년 IMF 이후 매출이 다소 부진하기도 했지만 안정적인 현금 거래로 자금 유통이 원활해 큰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쌍마는 그동안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충남대, 대덕대, 대전세관, 국가보안기술연구소, 담배인삼공사, 토지공사대전충남본부, 국가핵융합연구소, 국가항공우주연구원, 대전역, 한국 벤츠와 다임크라이슬러 자동차 부품 센터, 중부지방국세청, 충남대 공과대학 부속공장, 기초과학연구원, 국방과학연구소, 한국화학연구원, 대전대 30주년 기념관, 한국기계연구원 기계장비 이전, 가스기술공사(서울→대전), 서울국립중앙도서관, 조폐공사, 충남도교육청, 충남지방경찰청 등의 물동량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신 대표는 “다수의 숙련된 인적자원과 차량과 장비, 무진동차량 등 첨단이전 장비를 보유하고 있어 어떠한 형태의 공장기계와 기업이사(이전) 업무라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인프라가 구축돼 있다”고 소개했다. 또 “유성구(유성IC와 서대전 IC로부터 10㎞ 이내) 지역에 보관물류 창고 시스템을 조성해 각종 화물(이삿짐 공산품, 홈쇼핑, 인터넷 쇼핑물 등)의 하역보관 배송업무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주)쌍마는 공장이전, 기업이전, 물류보관, 포장이사업무 등 종합물류와 건물관리 아웃소싱 등에 있어 토털서비스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배전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며 “고객만족과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힘찬 포부를 밝혔다.
▲신명식 대표는 누구인가=1954년 서천에서 출생해 서천중과 군산 상업고, 방송통신대 경영학과, 단국대 경영대학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경영학 석사 학위 취득 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온 그는 충남대 행정대학원 최고위과정, 충남대 공과대학 테크노 최고경영자과정, 충남대 경영대학원에 이어 현재 충남대 평화안보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지금은 아모레 퍼시픽으로 바뀐 주식회사 태평양에서 대전공장 노무과장으로 일할 당시 산업현장의 심각한 인력난을 절감한 뒤 인력 파견사업을 구상했다. 그는 1989년 300만원으로 작은 사무실을 내고 태평양의 노무과장과 인력파견사업을 병행하면서 사업에 대한 노하우를 축적했다. 이후 1992년 사표를 내고 나와 갈비냉면집도 경영해보고, 전화번호책도 만들어보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은 뒤 그의 이름을 딴 (주)신명으로 법인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초기에는 차량 1대로 익스프레스 사업을 시작했다가 1992년 쌍마를 창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영에서 한없는 호경기는 없다고 생각하는 그는 언제나 불황을 준비하면서 안정적인 투자를 계속한다. 풍부한 현장 경험과 행정, 사무, 세무관리, 인력관리 등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온 그는 사업을 보다 철저하고 효율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늘 쉬지 않고 전진중이다.
한성일 기자 hansung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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