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능산리사지 공방지터 모습. |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에는 “백제 창왕 13년인 정해년에 (왕의) 누이인 매형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명문에서 '창'은 백제 25대 위덕왕의 휘이고, 재위 13년 정해년은 567년을 말하며 매형 공주는 위덕왕의 누이, 즉 성왕의 맏공주임가 원주(願主)가 되어 왕실의 사찰을 건립했음이 밝혀졌다. 능산리사지에는 나성과 직접 연결된 길과 대규모로 행차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형 목교, 빈번한 왕래를 보여주는 목교의 보수흔적 등이 남아 있었다. 이는 부여왕실에서 능산리사찰로 빈번히 행차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공방지였을 것으로만 생각했던 능산리 유적에서 목탑지, 사리감 등이 추가로 발굴되면서 능산리사찰 동쪽에 위치한 능산리고분은 왕의 무덤임이 확실시 됐다. 능산리사찰은 중문과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일탑일금당(一塔一堂)식의 백제식 가람배치이지만 일반적인 사찰과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금당은 통칸이 아닌 2개의 방으로 나뉘어졌고 서실에는 신좌(神座)로 추정되는 대석(臺石)이 있으며 동실은 초석이 없는 통칸으로 벽체없이 내부가 트여있는 점 등이 제례공간으로서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당지 동쪽의 건물지와 서쪽의 공방지 또한 퇴칸을 갖추고 2, 3실로 분리된 이례적인 구조다.
사리감에 적힌 명문내용과 능산리고분군 옆이라는 사찰의 위치를 고려할 때 능산리사찰은 능산리고분군에 잠들었을 위덕왕의 부왕인 성왕(523~554년)의 추복을 위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제작배경 어떤 의미 담겼나=백제금동대향로가 성왕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6세기 중반 백제와 신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과 성왕과 그의 아들 위덕왕 사이에 얽힌 사연을 들 수 있다. 백제의 가장 중흥기였던 6세기 전반, 이 시기 무령왕의 아들 성왕이 즉위한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한다. 한강 유역은 백제 왕실이 처음 국가를 세운 곳이면서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성왕은 이를 반드시 수복해야했다. 전쟁은 백제와 신라의 승리로 끝나고, 백제는 한강 하류를 신라는 중류 일대를 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2년 후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를 공격, 위덕왕은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만다. 이를 안타까워하는 아들을 본 성왕은 직접 전쟁이 참여 했으나, 성왕은 신라의 포로가 되고 결국 말을 키우는 노비에게 목숨을 잃고 만다. 554년 성왕이 전사하자 위덕왕은 부왕을 위해 왕릉 바로 옆 능산리에 절을 짓고 성왕의 추복을 위한 각종 제사와 불교의례를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위덕왕은 집권 초기에 성왕에 대한 추복사업과 함께 고구려ㆍ신라와의 전쟁을 통해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고, 567년 이후에는 백제 역사상 가장 활발한 대중교섭을 벌이며 대내적 체제정비에 필요한 선진문물을 수용해 왕권을 강화하고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선진문물 수용에 주력하여 문화종교적으로 절정기에 이르렀던 위덕왕대의 문화적 저력 속에서 위기 극복과 성왕의 영혼을 달래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상징물이다.
정성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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