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길버트 ‘선하고 옳은 말만 하는 사회’
'착함'에 집착하는 문화현상이 별나다. 벌써부터 추석맞이라면서 '착한 가격', '착한 소비'란 말이 많이도 쓰인다. 착한 점심, 착한 순대, 착한 낙지, 착한 커피, 착한 초콜릿은 '착한 가격'을 전제로 한다. 돈 앞에 '적합한(proper)', '합당한(reasonable)'이면 몰라도 '정당한(just)', '공정한(fair)'은 거북하다. 선악 판단이 개입되는 '착한'은 더하다.
그렇다고 가격을 도덕의 경지에 끌어올린 근대 이전의 유럽인들을 닮은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시장가격, 생산가격, 적정가격은 뒷전이고 규범적이고 윤리적인 '착한'을 유행어처럼 퍼뜨린다. 착함에 대한 집착이다.
정신과 의사 와다 히데키는 “일도 사랑도 이제 착한 사람이 성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가 소노 아야코는 역설적이다. “착한 일을 한다는 생각에 빠져 상대에게” 줄지 모를 상처나 불행을 경계한다. 착한 사람은 또 제비가 물어다준 박씨(흥부전), 연꽃이 상징하는 부처님의 가피(심청전), 어사가 된 이몽룡(춘향전), 유리구두를 준 선녀(신데렐라) 등 남의 도움을 받아야 뭘 하는 걸로 비쳐지기도 한다.
차라투스트라 어쩌고 하던 19세기 철학자를 기억할 것이다. 니체는 '좋은(독일어 gut)'을 ①착한-악한, ②좋은-나쁜 두 계열로 분류한다. ①은 약자의 도덕적 판단, ②은 고귀함과 강함 어떻고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착한'을 '좋은'과 등치시키는 발상은, '착하다'가 사회문화적인 구성물이 된 지금 보니 신기하다.
궁금하면 일상을 보자. 착한 고기 먹고 착한 다이어트를 하고 착한 여행을 떠나 착한 연애를 한다. 착한 운전 마일리지제도 신청한다. 통증에는 착한 통증과 나쁜 통증이 있단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역발전위원회에서 (진주의료원을 겨냥해) “착한 적자도 있다”고 했다. 악인으로 보이는 데 대한 저항감에 스스로 착하다고 합리화한다는 쪽은 댄 애리얼리라는 행동경제학자다. “난 착해요” “우리 마트는 착해요.”
그러다 들통 나면 전략적 마인드에서 나온 이벤트성 착한 거짓말이라고 엉너리친다. 수(秀)는 빼어나서, 우(優)는 넉넉해서, 미(美)는 아름다워서, 양(良)은 어질어서, 가(可)는 옳아서 착하다. '착하다'는 '좋은, 아름다운, 양심적인, 어진, 현명한, 덕스러운, 야무진'을 담는 오지랖 넓은 종합 찬미사가 됐다. 부모들이 싫어하는 '착함=약함' 등식도 있다.
헬렌 옥스버리의 '아기 늑대 세 마리와 못된 돼지'는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한다. 원작인 이솝의 '아기돼지 삼형제' 늑대는 '나쁜' 위험변수였다. 거리의 시인들의 노래 '착한 늑대와 나쁜 돼지새끼 3마리'의 돼지들은 늑대를 못살게 군다. 돼지는 착하고 늑대는 나쁘다는 이분법을 버렸다. 착함의 과잉은 생각의 다양성을 좀먹는다.
문화도 욕구도 섹시함도 착함으로 되고 마는 우리 사회. 이러다 '착한 여자' 하면 고운 성품이 아닌 예쁜 몸매 여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 누님들 이름에 많은 '숙(淑)'은 맑다, 착하다, 아름답다, 사모하다. '예쁘면 마음씨도 착하다'는 진화론적 번식의 관점에서만은 틀리지 않다.) 착한 아이, 착한 며느리 콤플렉스처럼 착함의 기준이 병이 된다. 일상이, 세상이 정말로 착해진 걸까. 귀해야 대접받는데, 착함이 너무 흔하다. 진정한 착함이 귀해서인가.
9월이다. 착한 9월인가.
최충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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