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my mind and in my car’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여버렸어
내 마음에서도, 차 안에서도)
급기야 화장실에도 스마트폰, 태블릿PC를 들고 들어간다. '신문은 화장실에서도 볼 수 있다'는 장점을 무시한 아이들 방에 신문을 1부씩 투입해줬다. 석 달쯤 지나자 효과가 슬슬 나타나더니 어느덧 신문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집안 얘기지만, 종이신문과 디지털 구독자가 공존하겠다는 희망, 장 보드리야르의 지적대로 상품이 아닌 기호를 소비하게 하면 되겠구나 싶은 가능성도 찾아냈다.
별것 아닌 이 일상의 작은 발견 이후로 마셜 맥루한이라는 학자의 “미디어는 몸의 확장이다”라는 주장을 더욱 신봉하게 됐다. 뉴미디어나 포털은 대중매체를 선택재에서 필수재로 만들었다. 올드미디어(언젠가 사라질 표현이다) 쪽은 영역을 침범당하며 영역이 확장된 양면성이 있다. 라디오가 MP3를 거쳐 인터넷, 스마트폰, DMB 등 매체에 올라탔듯이 바뀐 외양으로 너끈히 살 수 있으면 된다.
이럴 때 인용하기 딱 알맞은 고전이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Video Killed the Radio Star).' 버글스의 이 노래가 휩쓸고 지나간 1980년대는 컬러TV가 전축, 라디오를 접수한 듯 보였지만 라디오는 지금 자동차와 결합했고 인터넷과 더불어 부활했다. 무덤 속 LP판이 먼지 털고 나오자 전축 시장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과거의 마인드로는 물론 그 화려했던 영화(榮華)의 재연은 없다. CD 1장에 브리태니커 아성이 무너진 사례는 충분히 위협적이다. '화장실의 장점' 같은 건 고집하지 않아야 한다. 그럴 바에 '신문은 인터넷, 스마트폰과 달리 조급증을 부르지 않는다'(마음이 급하면 아드레날린 분비로 공격적 성향이 된다)를 내세우는 편이 낫다. 달달 외우고 스캐닝하듯 훑어 읽기에 능한 세대에게 종이신문은 더없는 경험적 요소다. 지난 토요일(22일) 중도일보를 찾아 신문제작 체험교육을 받은 예산삽교고 학생들을 보며 문득 들었던 생각이기도 하다.
신문과 잡지, 방송 등 전통 매체에 비하면 웹은 그야말로 임시변통의 땜질 같다. 인터넷을 뉴미디어로 분류하지 않는 광고회사가 벌써 나왔다. 세상 예언에는 '오보'가 많다. 전파매체 1세대 라디오가 책을 죽이던가. TV는 뉴미디어 아니면서 왜 살아 있나. “세계 컴퓨터 시장의 규모는 한 5대 정도”라던 1940년대 IBM 회장의 예언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최근 전면 온라인 전환을 단행한 미국 시애틀타임스가 기존 독자 다수를 잃은 것은 너무 앞서려다 실패한 경우다.
그래도 주제넘은 '예언' 한두 가지 해야겠다. 책이나 신문, 방송은 모습이 바뀌나 길을 내주기도 하고 새 길을 내기도 하면서 자리를 지킨다. 2050년 문자 소멸의 예언은 반드시 빗나간다. 따라서 활자매체는 소멸하지 않는다. 이 예언이 틀리면? 동물을 움직이는 기계로 비하한 데카르트를 대신해 길거리의 말 앞에 무릎 꿇던 니체처럼 참회라도 할까? 비디오는 라디오를 못 죽였다. '인터넷이 신문기자를 죽였어요.' 이런 노래는 나오지 않는다. 희망이자 믿음이다.
최충식·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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