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토크]오늘도 데드라인

  • 오피니언
  • 문화칼럼

[문화토크]오늘도 데드라인

  • 승인 2013-06-09 10:45
  • 신문게재 2013-06-10 21면
  • 최충식 논설실장최충식 논설실장
1시간 뒤.
“서둘러서 금방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5시간 뒤.
“현재도 원고와 씨름하고 있는 중입니다.”

스페인의 성가정 성당은 오랜 공사기간으로 유명하다. 10년 목표였던 1886년 시한을 12번 더 넘기고 아직 공사 중이다. 2026년 완공 예정도 그때 가봐야 안다. 계획과 현실은 다르다.

우리 업계 용어에 '데드라인'이 있다. 마감시간을 뜻하는 무시무시한 용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획과 현실의 갈림길인 죽음선, 사선(死線)에 근접할수록 자판 위 손가락은 마구 춤춘다. 싫든 좋든 누리는 '마감효과'다.

“발표 내용 정리 되셨습니까? 여쭤보려고 전화했습니다.”

“원고요? 아직 안 됐는데요.”

무계획 때문이 아니다. 머릿속으로는 늘 원고를 쓰고 있었다. 소요 시간을 과소평가하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예측한 '계획 오류'는 어쨌든 문제였다. 어떤 조사에서 최대 유혹에 57%가 일 미루기, 40%가 게으름 피우기로 나오긴 했다. 하지만 시간관리나 자기통제 실패로 오류지대에서 헤매지 않는다는 글공장 노동자들의 절규를 제발 이해해야 한다.

잘 써지면 잘 써지는 대로, 안 써지면 안 써져서 괴롭다. 오죽하면 작가를 감금하고 원고를 집필시키는 '간즈메(통조림, 가둠)'가 일본에 성행하겠는가. 책상 하나에 볼펜 몇 자루가 전부인 창고에 '통조림 당한' 개인적 경험으로도 신기한 마감효과를 익히 안다.

영감(靈感)은 이런 경황 속에 묻어오기도 한다. “신뢰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띄엄띄엄 본 드라마에서 주워들은 좌수사 이순신의 평범한 대사도 일종의 그런 촉매 작용을 했다. 마침 '신뢰'와 관련된 포럼을 앞두고 있었다. 영감이 오지 않으면 역시 자청해 영감을 만나러 가야 할 때도 있다.

“글 쓰는 놈들은 머리에 권총을 겨눠야 돼! 그러면 아이디어가 펑펑 솟아나거든.” 이런 살벌한 영화 대사가 있었다. 지지난해 논산으로 낙향한 박범신 작가는 옛날 절필 선언하면서 또 이랬었다. “권총을 뒤통수에 대고 쓰라고 해도 오늘부터는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다.…”

원고 칠거지악에는 아이디어 빈곤을 첫째로 든다. 그냥 노는 나태, 시간이 넉넉하다는 오만, 퀄리티 부족에 따른 분노, 불후의 명작을 향한 환상, 너무 파고 싶은 욕심, 깔끔하게 마감한 동료에 대한 질투도 물리칠 적이다. 진도가 안 나가면 남과 비교하는 '외부적 시각'이 때에 따라 도움이 된다. 한데 비교 대상자들의 사정이 약속이나 한 듯 똑같았다.

행사가 임박해서야 기다리던 교수의 메일이 도착했다.

“먼저 원고가 늦어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다시 이어지는 기다림. 드디어 원고다!

“여기 저의 졸고를 보내드립니다. 너무 늦은 점 사과 말씀을 드립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땀에 전 원고를 속독으로 훑는다. 발표할 내용이 종횡으로 정렬된 시점은 그 직후였다. “어떤 책, 논문에도 없는 독창적인 내용이더군요.” 옆자리 교수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칭찬했다. 원고에 걸린 시간은 통찰과 숙고가 여무는 산고(産苦)의 시간이었다.

이럴 때 마감시간은 기사의 약(藥)이다. 그 교수에게도 '계획 오류'가 결코 아니었다. 쇠뿔은 단김에 빼라지만 온화한 불꽃이 빵을 맛있게 만든다. 돌다리는 두드려보고 건너야 좋을 일이 많다. 이 핑계 저 핑계, 오늘도 데드라인의 철조망을 아슬아슬 타고 넘는다.

최충식 논설실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현장]3층 높이 쓰레기더미 주택 대청소…일부만 치웠는데 21톤 쏟아져
  2.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3. 차세대 스마트 교통안전 플랫폼 전문기업, '(주)퀀텀게이트' 주목
  4.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5. 전국 아파트 값 하락 전환… 충청권 하락 폭 더 커져
  1. 대전시, 12월부터 배출가스 5등급 차량 운행 제한
  2. 유등노인복지관, 후원자.자원봉사자의 날
  3. 생명종합사회복지관, 마을축제 '세대공감 뉴-트로 축제' 개최
  4. [화제의 인물]직원들 환갑잔치 해주는 대전아너소사이어티 117호 고윤석 (주)파인네스트 대표
  5. 월평종합사회복지관과 '사랑의 오누이 & 사랑 나누기' 결연활동한 동방고 국무총리 표창

헤드라인 뉴스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환이야, 많이 아팠지. 네가 떠나는 금요일, 마침 우리를 만나고서 작별했지. 이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환이를 사랑하는 선생님들이" 21일 대전 서구 괴곡동 대전시립 추모공원에 작별의 편지를 읽는 낮은 목소리가 말 없는 무덤을 맴돌았다. 시립묘지 안에 정성스럽게 키운 향나무 아래에 방임과 학대 속에 고통을 겪은 '환이(가명)'는 그렇게 안장됐다. 2022년 11월 친모의 학대로 의식을 잃은 채 구조된 환이는 충남대병원 소아 중환자실에서 24개월을 치료에 응했고, 외롭지 않았다.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24시간 환..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22일 대전에서 열린 환경부의 금강권역 하천유역 수자원관리계획 공청회가 환경단체와 청양 주민들의 강한 반발 속에 개최 2시간 만에 종료됐다. 환경부는 이날 오후 2시부터 대전컨벤션센터(DCC)에서 공청회를 개최했다. 환경단체와 청양 지천댐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공청회 개최 전부터 단상에 가까운 앞좌석에 앉아 '꼼수로 신규댐 건설을 획책하는 졸속 공청회 반대한다' 등의 피켓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은 경찰력을 투입해 공청회와 토론이 진행될 단상 앞을 지켰다. 서해엽 환경부 수자원개발과장 "정상적인 공청회 진행을 위해 정숙해달라"며 마..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