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멀지 않은 옛날에는 아낙들이 손수 빨래를 해야 했다. 말이 빨래지 몹시 힘든 일이었다. 작은 빨래들이야 별 문제가 없었지만 계절이 바뀔 때 마다 하는 이불빨래 등 큰 빨래들은 많은 공력을 필요로 하였다.
지금이야 한 겨울에도 따뜻한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당시 만해도 빨래하는데 따뜻한 물을 쓴다는 것은 호사스러운 일이었다. 한 겨울 찬물에 빨래를 하면 손등이 얼어 터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여러 아낙들이 모여서 빨래를 할 수 있는 빨래터가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
빨래터는 마을 사이로 흐르는 작은 냇가나 우물가에 만들어져 있었다. 마을 아낙들은 집집마다 빨래거리를 가지고 빨래터로 모여 들었다. 작은 빨래들은 혼자 방망이질을 하면서 빨았으나 이불빨래와 같은 큰 빨래들은 이웃아낙들과 서로 도우면서 빨래를 하였다. 특히 마지막에 비틀어 물을 짤 때에는 혼자 힘으로 도저히 물을 꼭 짜낼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 일을 세탁기가 대신해주고 있고 얼마 전에는 빨래를 한 다음에 물만 짜내는 기능을 가진 탈수기가 인기 있었다.
이 빨래터는 빨래하는 장소 이상의 대화와 소통의 장이었다. 각각의 아낙들은 나름대로 이야기 보따리를 빨래보따리만큼 가지고 나왔다.
각 가정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이웃마을 이야기, 굵직굵직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등 화기애애, 왁자지껄하면서 추위와 찬물의 냉기를 이겨내곤 하였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보나 슬기들을 서로 나누고 비누가 귀하던 시절 비누 한 조각이라도 나누어 쓰면서 서로들 정들어 가곤 하였다. 이러한 빨래터가 여름철에는 동네아이들 야외 수영장이나 목욕탕으로 변하곤 하였다. 옛 그림이나 사진 등에 그 정겨운 장면들이 남아있어 옛 추억을 자극하기도 한다. 빨래터에서 일어났을 법한 일들은 도시화에 따른 주거환경의 변화에 따라 미용실이나 목욕탕으로 자리를 바꾸어 갔다. 어쨌거나 빨래터에는 아낙들의 애환이 서려 있었다.
정동찬·국립중앙과학관 전시개발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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