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길호 ETRI 홍보팀장 |
하지만, CDMA(Code Division Multiple Access)를 개발하기 까지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이동하는 환경에서도 통신이 가능한 이동통신의 수요가 폭증했고 또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그동안 보안성을 이유로 제약을 받아오던 이동통신 분야에 족쇄가 풀려 수요가 급증했다. 이에따라 이동통신기술의 자립과 선진화의 필요성에서 CDMA 개발은 시작되었다. 당시 선진국들은 아날로그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찍부터 디지털 방식의 이동통신시스템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다. 미국은 시간분할(TDMA)방식, 유럽의 GSM방식, 일본의 PDC방식 등을 상용화해 저마다 세계표준방식으로 채택시키기 위해 마무리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그러던 중 ETRI는 미국의 작은 벤처기업이었던 퀄컴(Qualcomm)이 개발한 CDMA 이동전화 실험시스템을 만나게 된다. 퀄컴은 CDMA 원천기술 보유업체였던 것이다. CDMA는 가입자 용량이 아날로그 방식의 10배, TDMA 방식의 3배 이상이었고, 전파 효율성과 기지국 배치 면에서도 TDMA 방식보다 뛰어난 신기술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롭게 등장한 기술이었기 때문에 CDMA 방식으로 시스템을 개발할 경우 선진국의 시스템 기술 종속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 시장 진출에도 유리할 것으로 판단됐다.
그러나 국책 연구기관인 ETRI로서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기술을 선택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게다가 정부와 학계, 산업계 등을 설득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ETRI는 CDMA 방식을 선택할 경우 최신의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개발하고 상용화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논리로 정부와 학계, 산업계를 설득했고, 결국 1991년 5월 6일 퀄컴사와의 CDMA 기술공동개발 계약서에 서명한다. 대한민국 이동통신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CDMA는 1989년 1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약 8년에 달하는 연구기간과 더불어 약 996억원에 달하는 초유의 연구비, 투입연구인력만도 연간 1042명이었다. 물론 ETRI가 주관기관이었지만, 당시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허리라 일컬어졌던 LG정보통신, 삼성전자, 현대전자, 맥슨전자 등이 참여했다.
ETRI가 CDMA기술로 해외로부터 받은 기술료만도 3183억원에 달한다. CDMA를 두고 에피소드도 많다. 국감장에서 모 의원은 CDMA를 '씨디마'로 발음해 국감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는가 하면, 미국의 작은 벤처기업에 불과하던 퀄컴사는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 시가총액만 114조원으로 인텔을 추월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당시 CF도 CDMA를 '한국지형에 강하다'라는 카피를 쓰기도 했다. ETRI는 CDMA 기술을 발판으로 4세대 이동통신 시스템인 LTE-Advanced 시스템 개발에 성공하는 등 오늘날 세계 최고의 이동통신 강국의 역사를 써 나가고 있다.
ETRI가 CDMA라는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이동통신 역사는 물론 세계 이동통신 역사 또한 달라졌을 것이다.
정길호·ETRI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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