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8민주의거기념사업회 최우영<오른쪽> 공동의장과 김선균 사무처장이 서구 둔산동의 기념탑 앞에서 52년 전을 회상하고 있다. 이민희 기자 |
그들에게 52년 전 학교를 박차고 나와 학원의 자유화를 외치던 혈기는 어느새 희끗한 백발로 변해있었지만,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앞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눈빛을 보냈다.
3ㆍ8민주의거 52주년을 앞두고 7일 서구 둔지미공원의 기념탑에서 3ㆍ8민주의거기념사업회 최우영 공동의장과 김선균 사무처장을 만났다. 이들은 1960년 대전고 2학년 학생이면서 3월 8일 학생 1000여명과 함께 거리에 뛰쳐나가 '외부세력 학원침투 방지', '교내에서 선거운동반대', '정부신문 강제구독 거절' 등을 외친 당사자다.
당시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여당인 자유당의 행사에 학생들을 동원하고 학교 내에서 정권을 홍보하고 돈선거까지 모든 부정선거방법이 동원되던 시기다.
최우영 공동의장은 “학교가 정치에 휘둘리면서 탄압받고 정부성향의 신문을 강제구독시켜도 누구도 바른 말을 하지 못하던 시기”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2월 28일 경북고 학생들이 학교단위로는 처음으로 시위를 감행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전고 학생들도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출렁이고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김선균 사무처장은 “3ㆍ8민주의거가 치밀하게 준비됐다기보다 학생들이 사회의 불합리한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열정이 있었고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폭발하듯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3월 8일(당시) 오후 3시께 대전고 2학년 1000여명의 학생들은 민주당 후보 장면 박사가 박순천 여사와 함께 유세가 예정된 대전 공설운동장으로 향했다. 최 공동의장은 “우리가 느끼는 사회적 불합리함을 많은 시민에게 알릴 수 있는 곳이 공설운동장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경찰의 저지로 공설운동장에 접근하지 못한 학생들은 여러 무리로 나뉘어 방향을 바꿔 대전역을 거쳐 목척교에서 중앙시장까지 대전시내에서 '외부세력 학원침투 방지'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들은 곤봉과 개머리판으로 학생들은 무력으로 진압했고 80여명이 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했다.
대전 3ㆍ8민주의거는 대구 2ㆍ28민주운동에 이은 전국 두 번째 학생 민주화운동이었고, 이는 4ㆍ19혁명의 기폭제였던 마산 3ㆍ15의거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됐다. 이들은 민주화의 역사적 의미가 깊지만 대전 3ㆍ8민주의거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는데 아쉬움을 토로했다.
최 의장은 “3ㆍ8민주의거는 4ㆍ19민주항쟁의 민주화를 쟁취하는 도화선이었던 것으로 학생들이 순수한 목적으로 했다는데 의미가 크다”며 “3ㆍ8민주의거 정신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대구와 마산은 각각 2월 28일과 3월 15일을 시민의 날로 지정해 민주의거를 기념하고 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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