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난순 교열부장 |
1984년 '처녀처럼'을 시작으로 마돈나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세상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영화 '저수지의 개들'에서 이 노래가 연약한 여자의 사랑노래가 아니라 성적인 의미의 노래라며 음담패설에 가까운 해석을 수다스럽게 늘어놓는다. 마돈나는 여성들이 옷차림, 성(性), 직업 등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수 있는,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자신의 삶을 장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래서 마돈나는 가부장제 사회가 굳건한 마초들의 세상에서 '나쁜 여자'였다.
마돈나는 성담론의 중심에 서는 예술가다. 많은 여자를 정복하는 남자는 찬사를 받으며 카사노바로 떠받드는 세상에서 여러 남자를 섭렵한 마돈나는 창녀라고 인식된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욕망하는 주체가 되면, 그녀는 사회적인 파멸을 초래한다. 안나 카레니나처럼 아이가 딸린 유부녀가 브론스키 대위를 욕망하면 결국 철길 위에 몸을 던지는 자살의 형식으로 처벌을 받게 한다.
프로이트는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에서 “해부학적 구조는 운명이다”라고 주장했다. 성의 해부학적 차이가 남녀의 심리에 영향을 끼치므로 여성의 열등성과 수동성은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은 해부학은 운명이 아니라 후천적인 교육에 의한 문화적 산물이라고 반박한다.
마돈나 역시 프로이트의 이론을 조롱이라도 하듯 다양한 모습의 힘을 가진 여자로서 자신을 증명한다.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는 남자들을 사마귀처럼 짝을 먹어치우는 요부를 자처했다. 성적인 제스처가 워낙 강하다 보니 강경파 여성주의자들은 마돈나가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며 남성중심의 성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킨다고 비난했다. 주류사회 또한 마돈나가 낙태, 동성애, 흑인 등 소수집단에 호의적이라는 이유로 분개했다.
마돈나는 강력한 여성이다. 그녀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성적인(여성성) 힘과 정치적인(남성성) 힘을 모두 획득했다. 때문에 남자들은 마돈나 같은 여자를 두려워할지 모른다. 남자들의 이런 공포감을 상쇄시키기 위해선 어머니와 같은 모성을 발휘해야한다.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바리데기의 모성적 포용력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고대 설화 '바리데기'가 고도로 문명화된 21세기의 진화된 여성상을 제시하고 있다.
바리데기가 누군가. 바리데기는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버려졌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대를 이을수도 없는 일곱 번째 딸은 버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부모를 살리는 생명수를 구해와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다. 바리데기는 죽음을 감행한 여정을 모든 생명의 가능성이 다 들어있는 자궁을 갖고있는 여성의 힘으로 견딘다. 그것은 자신을 버린 부모도 살릴 수있는 생명수를 담고 있는 모성이다.
얼마전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가 취임해 공교롭게도 여야 주요정당의 당수 자리를 여성들이 차지했다. 한국여성들의 UN여성권한 지수가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는 현실에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반면 충청권의 4·11총선 예비후보중 여성은 단 4명이다. 비율로 따지면 3.7%다. 여성들의 '자기만의 방'을 마련할 여건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이제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강조했던 피해의식이나 남성에 대한 투쟁의식은 버려야 한다. 바리데기가 자신을 버린 아비를 비롯 세상의 남성들을 구원했듯이 모성, 사랑등 여성적 가치를 부각시켜야한다. 남자 또한 상처입은 존재들 아닌가.
영화 '바그다드 카페'에서 예쁘지도, 날씬하지도 않은 야스민은 미국의 허름한 카페 '바그다드'를 삶의 활기가 넘치는 곳으로 바꾼다. 야스민은 물처럼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바람처럼 지친 영혼을 살려낸다. 그녀는 바리데기처럼 아무것도 주장하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는다. 장 보드리야르의 “여성의 힘은 유혹의 힘이다”라는 말을 그녀들이 증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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