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AIST 전경 |
또 기초과학 연구활동을 공학과 기술에 접목시키기 위해 헬스케어 시스템과 녹색교통, 녹색에너지 등의 3가지 분야를 설정, 혁신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연구자원을 집중해 나갈 계획이다.
서남표 총장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개교 40주년을 맞아 이 같은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비전 2025'를 공표했다. 이 비전 2025는 세계 최고의 연구중심 선도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한 KAIST의 꿈과 희망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이를 토대로 가장 뛰어나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프로그램을 선별해 우선 지원할 계획이다.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다'는 불혹(惑)을 맞이한 KAIST의 발자취를 살펴보자. <편집자 주>
▲ 1970년 12월 한국과학원법시행령이 공포되고, 1971년 초 한국과학원정관이 완성됐다. 초대 원장으로 당시 원자력청장에 재직하고 있던 물리학자 이상수 박사를 임명됐다. |
과학기술처를 중심으로 한국과학원 설립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한국과학원법(안)이 1970년 4월 국무회의를 통과해 5월 국회에 제출, 7월 임시국회에서 의결돼 마침내 8월 7일 공포됐다. 설립 재원의 상당 부분을 지원해 줄 미국 측과의 접촉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김 전 장관은 AID 측에 한국과학원 설립을 위한 교육차관 제공을 요청했고, AID 측은 한국과학원의 설립 가능성 검토와 설립 사업에 대한 자문을 임무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조사단의 단장으로는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로 알려진 스탠포드 대학의 명예교수 터만 박사가 임명되어, 일명 '터만 조사단'이 결성됐다.
▲ 한국과학원은 1971년 2월 18일 오전 10시 30분 과학기술처 상황실에서 열린 창립이사회와 함께 탄생했다. |
같은 해 2월 문교부가 한국과학원 정관에 동의하고 설립 등기가 완료됨으로써 한국과학원의 공식적 설립 작업이 완료됐다. 그리고 마침내 1971년 2월 18일 오전 10시 30분 과학기술처 상황실에서 열린 창립이사회와 함께 한국과학원이 탄생했다.
▲우리나라 최초 전문 이공계 교육 시작=2년여 간의 준비기간을 거친 뒤 1973년 1월 경희대학교에서 한국과학원의 첫 입학시험이 실시됐다. 이날 총 549명의 지원자가 시험에 응시, 최종합격자 106명을 선발했다. 1973년 3월 5일, 2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친 한국과학원의 첫 입학식이 거행됐다.
이러한 조건에 힘입어 한국과학원은 첫 신입생이 입학한 이래 매년 3대 1 이상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안정적인 학생 수급에 성공했다.
1970년대 한국과학원 석사과정 합격자의 80%가 서울대학교 출신이었다. 한국과학원 학생들은 졸업 후 기업체, 정부기관, 연구소, 대학 등으로 대거 진출해 각 분야의 고급인력으로 활동했다. 1970년대 석사과정 졸업생 716명 중 연구소로 진출한 학생이 38.7%(277명)로 가장 많았고, 이 중 67명은 국방과학연구소로 진출했다.
그 다음으로 기업체 28.8%(206명), 정부기관 8.5%(61명) 순이었다. 이 중 절반 이상인 38명이 국방부에 자리를 잡았다. 즉, 14.7%(105명)의 학생이 군 관련기관인 국방부와 국방과학연구소로 진출한 것인데, 이는 한국과학원이 군 전문가 양성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89년 대전에 둥지=한국과학원이 5회에 걸쳐서 석사 신입생을 선발하고 졸업생을 3회 배출한 1977년은 발전의 제2단계에 접어든 해였다. 1977년은 또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해로, 박정희 정부는 이 시기의 중점적인 과제를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으로의 변화로 설정했다.
그 결과 정부출연연구소들이 대거 설립되어 연구원의 수요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이런 고급인력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대학원은 한국과학원뿐이어서, 이는 한국과학원이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와 같은 상황의 변화에 '한국과학원 제2차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서울 홍릉캠퍼스의 수용능력을 초과, 시설 확장이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제약을 해결하기 위해 마련된 해법이 대덕분원 건설이었다. 1978년 3월 열린 이사회에서는 대덕캠퍼스 건설 계획이 보고, 7월에는 캠퍼스 부지를 결정했다.
논란 속에 통합된 KIST와 한국과학원은 1981년 1월 5일 한국과학기술원(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이하 KAIST)이라는 새 이름으로 출범했다.
이때부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KAIST'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1986년 3월 3일 과기대의 역사적인 첫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써 KAIST라는 간판 아래 옛 한국과학원과 옛 KIST, 신설된 과기대가 공존하는 '한지붕 세가족'시대가 시작되었다.
1988년 한국과학기술원 특별법이 제정되어 KIST를 하나의 정부출연연구소로 만들어 독립했다. 1989년 2월, 전학제 원장의 후임으로 이상수 한국과학원 초대 원장이 제6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대덕단지로의 이전은 점점 가시화됐다.
1990년 3월 2일에는 현판식과 신입생 입학식이 대덕캠퍼스에서 열렸고, 4월에는 서울에 있었던 많은 부서가 대덕으로 이전해 본격적인 대덕캠퍼스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세계의 중심에 서다=KAIST는 개교 이후 한국 과학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다른 국립대학에 비해 역사가 많이 뒤져 있지만 MIT 등과 같은 세계 정상급 대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 탓에 현재 이공계 연구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KAIST의 장점은 변화하는 지성이다. 매년 최우수 인재가 몰려들고 교수진도 화려한 KAIST 연구실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정상은 오르기보다 지키기가 더 힘들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서남표 총장 취임 이후 2007년 수립한 'KAIST 5개년 계획'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세계 10대 대학이 되는 것을 목표로 세워진 KAIST 5개년 계획의 골자는 △세계 최고의 교육제도 △세계 최고의 융합 연구체계 △자율과 책임의 경영 혁신 △국제적 수준의 개방과 협력이다. 또한 서 총장은 올해 개교 40주년을 맞아 이 같은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비전 2025'를 공표했다.
서 총장은 기초과학 강화를 위해 “뛰어난 재능과 잠재력을 가진 교원을 임용해 기초과학 분야를 2배 이상 키우고 강화할 것”이라며 “기초과학과 공학 분야 모두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헬스케어 시스템, 녹색교통, 녹색에너지 등 3가지 분야에서 혁신적인 해결책을 찾는데 우리의 자원을 집중해 나갈 것”이라고 향후 KAIST가 추진할 핵심연구 분야를 제시했다.
연구를 통해 혁신적인 교육환경을 조성하는 방안도 내놓았다. 서 총장은 또 “기존 아날로그식 교육을 소프트웨어와 정보통신기술(ICT)의 지원을 받아 '개별화된 지식을 디지털화해 지식 습득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교육(EDDKA)'으로 전환하기 위한 KAIST 교육계획을 수립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KAIST 교육센터'를 설립, EDDKA를 KAIST 내에 적용해 초기에는 학부생들의 교육을 지원하는 장비와 제품을 개발하고 점차적으로 모든 과목과 교육과정으로 그 적용범위를 넓혀 나갈 계획이다.
/배문숙 기자 mo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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